[천지일보=송범석 기자] 2007년 가을, 표제작 <해협의 빛>으로 문학동네신인상을 수상하며 등단한 이래 꼭 오 년 만인 2012년 가을, 전혜정의 첫 소설집이 출간됐다.

저자는 삶과 죽음, 선과 악에 관련된 이미지를 끊임없이 부유시키는 데 탁월한 재능을 가지고 있다. 그가 뱉어내는 언어의 향연은 묘한 느낌을 준다. 그의 언어에 휩싸이는 순간 흡사 먹구름이 내려앉은 벌판을 헤매게 되는 기분이 감돈다. 마치 암흑 속에서 일렁이는 한 가닥의 기묘한 빛을 따라가는 그로테스크한 풍경처럼 말이다. 이런 이미지로 그는 생명체가 지닌 본능적인 삶의 규율을 하나하나 벗겨낸다.

그의 소설에는 작중인물들과 독자를 압도하는 ‘폭력’과 ‘재앙’이 등장하는 게 특징이다. 그리고 이러한 불가항력적인 힘의 배후에 국가, 종교와 같은 억압적인 권력기관이 있다. 권력을 등에 업은 힘센 이들이 폭력을 거침없이 행사하는 이유, 그리고 나약한 우민들이 희생양의 운명을 손쉽게 받아들여 이에 동조하는 이유는 가족과 공동체의 안녕을 위해서라는 막연한 믿음 때문이다.

특히 그의 소설에는 뚜렷한 시점적 배경이 없다. 이를 통해 그는 특정한 집단이나 개별적인 인간의 범위에 프레임을 가두지 않는다. 이는 외려 인류 공동체의 보편적 운명에 관련된 진실을 보여주려는 시도일 것이다. 이 같은 의미에서 그의 소설은 우리가 마주하는 삶의 단면들, 그리고 우리가 외면하는 우리의 맨얼굴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해협의 빛>에서 ‘나’는 바다에서 사체를 인양하는 병사다. 신의 저주로 역병에 걸린 도시 ‘D……’의 배교자들의 시신이 바다로 떠내려오는 것이다. 병사들은 수포와 피고름으로 뒤덮인 사체를 갈고리로 끌어올리고 불에 태워버림으로써 자신들의 소임을 다한다. 그런데 병사들에게도 역병이 발발하고 그들은 혼란과 공포와 배신감이 뒤섞인 감정을 느낀다.

역병은 배교자를 벌하려는 신의 뜻, 선민인 자신들에게는 결코 일어날 수 없는 것이었기에. 그들은 두려움을 잊기 위해 금지된 사냥과 음주, 도박에 빠져든다. 어느 날 군목이 숨겨둔 보고서가 발견되고 거기에는 누구도 믿지 못할 진실이 적혀 있다.

본래 병사들은 신의 뜻을 행하는 선민이 아니라 D…… 출신인 이교도들의 자식이기에 이곳에 고립된 채 위험하고 의미 없는 작업들을 행해왔다는 사실을 알고, 나는 그간 지옥으로 알고 있었던 도시 D……로 떠나고자 결심하는데….

전혜정 지음 / 문학동네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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