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옥 문방구류(위쪽)와 백옥 참외형 주전자 및 잔대 (사진제공: 가원공방)

신라 진평왕, 하늘로부터 받은 옥대
벽사( 邪)의 기능 가진 신기(神器)
권위와 신분 상징하는 최고의 보물

[천지일보=김성희 기자] 중국 후한(後漢)의 설문해자(設文解字)에는 옥(玉)을 ‘아름다운 돌’이라고 말하고 있다.

옥을 활용하기 시작한 근원지는 본래 중국에서부터다. 신석기시대부터 돌도끼, 팔찌, 목걸이 등 실용품으로 쓰이기 시작한 옥은 의례용, 제사용으로 사용했다. 명청(明凊시대에 옥기는 갖가지 색채의 재질이 사용돼 궁정이나 대가(大家)에서 쓰는 향로나 서재의 문방구로 만들어졌으며 청 건륭(乾隆) 때 그 쓰임이 최고조에 달했다.

우리나라 역시 선사시대부터 옥을 장식품을 사용해왔다. 그 한 예가 국립부여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관옥(管玉)이다. 부여군 초촌면 송국리에서 출토된 관옥은 길이가 0.9~3.3㎝에 이르는 옥 대롱을 끈으로 이은 것이다. 이 밖에도 신라시대 옥 제품으로 옥구슬과 목걸이, 곡옥(曲玉) 등이 발견됐다.

금이 발견되기 전까지 옥은 최고의 보석으로 자리매김해왔다. 조선시대만 해도 옥을 귀하게 여겨 왕이 사용하는 도장을 옥새(玉璽), 왕의 앉는 의자를 옥좌(玉座) 등으로 표현하며 권위와 신분을 상징했다. 또 궁에서 왕과 왕비가 착용하는 장신구에는 옥으로 만든 것이 많았다.

특히 조선시대 왕의 장례 때는 예외 없이 옥이 사용됐는데, 대표적으로 죽은 임금의 입에 옥을 물게 했다.

옥으로 만든 제품은 신성한 영험이 있다고 여겨지기도 했다. ‘삼국유사’에는 신라의 3대 보물이 등장한다. 황룡사 장륙존상과 황룡사 구층탑, 그리고 579년 진평왕이 하늘로부터 받은 옥으로 장식된 허리띠다.

신으로부터 받았다는 진평왕의 옥대는 신라가 망할 때에 고려 태조 왕건에게 바쳐졌는데, 길이가 10척(3m)이며 62개의 옥 장식이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옥대는 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귀한 물건일 뿐 아니라, 적병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될 정도로 벽사(辟邪-사악을 물리침) 기능을 가진 신기(神器)로 여겨졌다.

이렇듯 옥은 영성(靈性)을 지녔다 여겨 선사시대부터 권위의 상징으로 또 아름다움을 치장하는 장식품으로 사용됐다. 또 옥은 사귀(邪鬼)를 물리치는 벽사(辟邪)의 힘과 군자의 덕인 ‘인의예지충신’을 나타내므로 예부터 군자는 반드시 옥을 지녀야 한다고 여겼던 것이다.

연옥에 속하는 백옥은 색상과 광택이 부드럽고 온윤(溫潤)한 느낌을 주며 은은한 광채가 있고 깨끗해서 바르고 기품 있는 군자를 연상케 한다.

옥은 그 색상에 따라 값어치가 결정되기도 하는데 빛깔에 대한 것은 시대나 사람에 따라 견해가 다양하다. 백옥 중 양의 비계를 잘라놓은 것 같다 하여 양지옥(羊脂玉)을 상품으로 치는 게 중론이다.

청나라 때 당병균이 엮은 ‘문방사고도설’ 중 옥분오색(玉分五色) 조에는 서역 우전옥을 들어 이렇게 적고 있다.

“무릇 옥기는 백색이 첫째요, 황색과 푸른 벽(碧)색이 그다음인데 백옥은 그 빛깔이 타락(우유의 별칭) 빛이 가장 귀하고 반탕빛, 곧 냉(冷)색이나 기름빛깔, 설화(雪花)가 있는 것이 그 다음이다. 피처럼 붉은 이른바 시체의 핏기가 스며든(부장품의 경우) 혈옥(血玉) 또한 아주 귀한 것이다.”

우리 민족의 사랑을 받아온 귀하고 값진 돌 ‘옥’은 과거에 비해 그 빛을 잃어가고 있다. 다른 보석에 비해 구식으로 여겨져 외면당하기도 한다. 하지만 옥은 아무나 함부로 지닐 수 없었던 나라를 지키는 왕의 보석이다.

오늘날 다시금 ‘옥’이 지닌 신성을 발견하고 그 속에 담긴 문화적 가치를 깨달아 찬란한 한반도의 ‘옥’ 문화를 회복할 수 있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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