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화홍문에는 물이 지나가는 7개의 홍예문이 있는데 수원성지 홈페이지에 따르면 이 문은 예수가 백성들과 맺은 7성사를 의미한다. ⓒ천지일보(뉴스천지)
천주교인 정약용이 설계해
곳곳에 종교적 메시지 남겨

[천지일보=이혜림 기자] 동남각루를 향해 한 계단씩 오르다 보니 성곽의 아름다움에 셔터를 누르게 된다. 이곳은 우리나라에서 ‘성곽의 꽃’이라고 불리는 수원화성. 끝없이 펼쳐진 성곽을 보면 그 모습에 “우와” 하고 탄성이 나올 정도로 장관을 이룬다.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수원화성은 19곳 이상의 순교 현장과 증거지가 발견된 순교성지다. 천주교에 따르면 수원화성 안팎에서 많은 신자들이 고문을 당하고 목숨을 잃었다. 수원화성의 아름답고 웅장한 모습 속에 슬픈 사연들이 감춰져 있었다.

◆정조, 야망 이루기 위해 화성 세우다
1997년 유네스코는 중국의 만리장성이 부럽지 않을 정도로 잘 만들어진 수원화성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했다. 이 멋진 화성은 누가 만들었을까. 수원화성은 조선시대 정조가 만든 작품으로 총 길이 5.7㎞, 면적 1.2㎢에 달한다.

정조는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려면 새로운 정치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의 야망을 구현하기 위해 다산 정약용에게 설계를 맡겼다. 한국 최대의 실학자이자 개혁가로 저명한 정약용은 20대 초반 서학을 통해 천주교를 접했다.

이후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 활동했지만 당시 시대적 상황에 부딪혀 순탄치 못한 삶을 살아야 했다고 천주교 신자들은 말한다. 정조는 당초 화성을 짓는 데 10년이 걸릴 것으로 예상했지만 정약용이 당대의 최첨단 기자재 기중가설(도르래)을 도입해 34개월(중간의 6개월 쉰 기간을 생각하면 28개월) 만에 수원화성을 완공했다.

◆절실한 천주교 신자였던 정약용
이때 천주교 신자였던 정약용은 자신의 신앙심을 화성에 표현했다. 22세에 성균관에 들어간 정약용은 학문이 뛰어나 정조에게 총애를 받았다. 그는 다음 해 큰형인 정약현의 처남 이벽을 통해 천주교를 접하게 된다. 28세에 과거에 합격해 벼슬길에 올라 정조의 최측근으로 활동했던 정약용은 1800년 정조가 승하하자 대왕대비 정순왕후 김씨의 천주교 탄압령을 시작으로 탄압을 받기 시작한다.

한국 천주교회에서는 이를 ‘신유박해(辛酉迫害)’라고 부르는데 이 안엔 당대의 정치적 싸움이 내재돼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약용과 둘째 형 정약전은 이미 천주교를 떠나버린 뒤라 사형에서 유배로 감형됐지만 손위 형인 정약종은 신앙을 버리지 않아 장형을 받던 중 죽었다.

수원화성은 정조의 오른팔로 활동하던 정약용이 천주교 신앙을 하고 있던 때인 30세에 설계한 것이라고 천주교 측은 말하고 있다. 이 때문에 수원화성 곳곳에는 정약용의 신앙적 메시지를 엿볼 수 있다.

▲ 화성 내에서 가장 경관이 아름다운 방화수류정 벽면과 천장에는 십자가 문양이 있는데 이는 화성을 설계한 정약용이 당시 금지된 천주교를 은밀히 홍보하는 방법으로 사용했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곳곳에 숨은 신앙적 메시지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바로 화성의 동북각루 방화수류정이다. 보물 제1709호인 방화수류정은 ‘꽃을 찾고 버들을 쫓는 정자’라는 뜻을 가졌지만 본래는 주변의 감시를 위해 세워진전시용(戰時用) 건물이다.

이곳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절벽아래의 용연과 함께 경치 또한 좋은 곳으로 휴식처가 될 뿐만 아니라 유사시적의 동태를 살피고 감시하기 적합한 곳이다. 방화수류정은 건물 자체로도 보는 이들로 하여금 감탄을 금치 못하게 할 정도로 그 문형이 수려하다. 정자는 신발을 벗고 출입할 수 있게돼 있어 화성을 걷다가 지친 관광객들이 이곳을 찾기도 한다.

이 정자는 쉼터라고 표현하기엔 너무 부족하다. 정자에 올라서면 시원한 바람과 함께 아름다운 경관을 볼 수 있다. 정자에 앉아 물 한 모금을 먹고 있노라면 신선놀음이 따로 없다.

석양이 질 무렵 이 건물을 앞에 두고 왼쪽으로 돌아가 보면 그 아름다움에 넋을 잃게 된다. 그 이유는 벽면에 있는 86개의 하얀색 십자가형 무늬 때문이다. 화성성곽에 관한 경위와 제도·의식 등을 기록한 책인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에서는 이 부분을 ‘벽체석연(甓>砌7石緣)’이라고 이름 지었다.

벽체석연의 십자가는 벽돌과 석회를 섞어 발라 석양이 지면 빛난다. 동쪽이 아닌 서쪽에 벽을 쌓아 십자가를 새겨 넣은 것은 당시 천주학을 서학이라 하였고 십자가의 광명은 서쪽에서 온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는 게 천주교 측의 설명이다.

정자 안 천장을 바라보면 또 하나의 비밀을 찾을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십자가 모양을 한 서까래다. 벽면과 천장에 있는 십자가 문양은 화성을 설계한 정약용이 당시 금지된 천주교를 은밀히 홍보하는 방법으로 사용했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방화수류정에서 장안문 방향으로 내려가면 화홍문(華虹門)을 만날 수 있다. 화홍문은 방화수류정과 함께 화성 내에서 가장 경관이 아름다운 장소다. 수원성을 흐르는 물은 방화수류정 앞 용연에서 물이 한 번 휘돌아 나온 뒤 화홍문을 거쳐 남수문을 지나 빠져나가는 구조로 돼있다.

이 문에는 물이 지나가는 7개의 홍예문이 있는데 이는 예수가 백성들과 맺은 7성사를 의미한다. 화홍문은 원래 북수문이라는 이름이었지만 ‘아름다운 무지개문’이라는 의미로 화홍문이라 불리게 됐다. 무지개는 구약에 노아의 홍수 이후 하느님께서 인간과 맺은 계약을 상징한다. 문 위에 있는 누각 안에도 방화수류정에서 본 십자가모양의 서까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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