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이름은 그 사람의 정체성과 절묘하게 부합되는 경우가 많다. 절강성 태주 출신이었던 가사도(賈似道)는 남송 말 삼조(三朝)의 재상을 역임했으나, 송의 4대 간신에 속한다는 역사적 평가를 받았다. 성으로 사용한 가라는 글자는 상인과 관련된 글자이다. 사이비(似而非)는 비슷하지만 아니라는 뜻이다. 가사도는 운수(雲水)라는 도사와 함께 가부좌를 틀고 앉아 불로장생술을 연마했다. 그의 이름을 억지로 풀이하면 거간꾼으로 사이비 도인이라는 뜻이다.

역사의 평가도 그렇다. 그는 서호 부근에 지은 반한당(半閑堂)이라는 대저택과 유람선에서 정무를 처리했다. 황제를 만나는 것도 열흘에 한 번이라는 특혜를 누렸다. 그의 족적은 남송이 몰락하는 축소판이다. 건달로 젊은 시절을 지낸 가사도는 이종(理宗)의 귀비로 책립된 누나의 치마끈에 매달려 출세가도를 달렸다. 황실의 토지를 담당하는 적전령(籍田令)으로 임명되자 서호에 대저택을 짓고 황제를 초청하여 형제처럼 놀았다.

진회(秦檜)가 여진족의 금과 화의를 추진했다면, 가사도는 몽고족의 원과 화의를 추진했다. 진회와 가사도는 자신의 영화를 위해 화친을 추진했으므로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였다는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대중화주의와 다민족국가를 지향하는 지금의 중국에서는 민족끼리의 화해를 추진한 평화주의자로 재평가된다. 이민족의 침입과 싸우는 것이 옳은가? 적당히 구슬려 화친을 체결하는 것이 옳은가? 대부분의 역사는 용감히 싸운 사람들을 영웅시한다. 그러나 이기면 좋겠지만 싸우다가 망한 경우도 적지 않으니 간단히 평가할 일은 아니다.

김성한의 임진왜란이 칠년전쟁이라는 이름으로 복간되었다. 임진왜란 7갑자가 되는 해에 대통령의 독도방문으로 일어난 마찰을 주시하면서 당시를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소설은 우리 민족이 겪은 가장 참혹한 전쟁의 전말을 웅장하고 생생하게 묘사하여 읽는 재미도 만만치 않지만, 일본에 대한 정보부족과 조정의 무대책이라는 정형화된 틀에 만족하지 않는다. 전쟁을 막으려고 기를 쓰던 대마도 사람들의 눈물겨운 노력과 이순신 우상화 덕분에 왕따가 된 원균의 고충도 눈물겨울 정도였다.

몽고가 고려를 침공한 것은 배후의 위협을 제거하기 위한 조치였다. 남송이 제법 버틴 배경에는 고려가 강화로 천도하여 저항했던 덕분이다. 실제로 가사도는 화친에만 매달리지 않았다. 그는 품계에 따라 토지를 제한하는 한전법(限田法)으로 부국강병을 위한 재원마련에 주력했다. 그러나 평화에 안주하던 관리와 지주들의 반발로 성과를 얻지는 못했다. 지식인들마저 개혁정책에 저항하자 입사적(入士籍)이라는 법을 제정하여 언론을 탄압했다. 가사도는 친히 출병했지만 대패했다. 양주(揚州)로 물러난 그는 병을 핑계로 은거했다. 갈령의 전답과 정원과 저택은 모두 몰수하여 군비로 충당했다.

<송사>에는 나라를 망친 22명의 간신에 대한 기록이 있다. 휘종을 타락시킨 채경(蔡京), 항금명장 이강(李綱)의 정적이었던 황잠선(黃潛善)과 왕백언(汪伯彦), 악비를 죽인 진회와 몽고와 화의를 체결한 가사도까지는 이해할 수 있지만, 끝까지 북벌을 주장한 한탁주와 유명한 정치가이자 역사가였던 사마광(司馬光)까지 포함된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없다. 송이 과연 진회와 가사도를 비롯한 22명의 간신 때문에 망했을까? 남송은 초기부터 재정적인 압박을 받았고 강남으로 옮긴 후에도 효과적인 재정운영과 징세방법을 찾지 못했다. 명문가의 조세저항 때문에 건전한 재정을 확보하지 못한 남송은 결국 악성 인플레이션을 발생시켰다.

가사도는 부유층의 재산을 공전으로 매입하여 재정을 충당하려다가 기득권의 반발로 희대의 악인이 되었다. 가사도가 그렇게 무능한 간신이었다면 어떻게 삼조를 거치면서 재상을 할 수가 있었을까? 아무리 역사에 대한 평가가 후세사람들의 권리라지만, 왠지 가사도만 왕따를 당한 것 같다. 변명할 기회를 준다면 그도 할 말이 많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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