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의 개신교는 ‘개혁(改革)’이란 이름으로 탄생했다. 495년 전 마틴 루터(1483~1546)는 독일 비텐베르크 성문 앞에 ‘95개 반박문’을 게재함으로써 소위 종교개혁의 아침을 열었다. 당시 부정과 부패 그리고 타락으로 얼룩진 중세교회의 상징이었던 ‘면죄부(免罪符, 죄를 면하는 대가로 금품을 받고 발행한 증서)’ 판매에 대한 항거였다.

 

따라서 타락과 부패로 성서적 진리에서 멀어졌던 교회를 ‘말씀과 믿음’이라는 성서적 패턴으로 다시 돌이킨 복음의 전환기를 가져다 준 그날을 오늘날까지 대부분의 신앙인들은 기념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날을 추억하고 기념하는 것이 다가 아님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약 오백 년이 지난 오늘날 개신교는 다시 그날의 항거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추락했다는 사실이다. 개혁돼 오늘에 이른 개신교는 오백 년 전 부패했던 중세 가톨릭교회를 능가하는 부패와 타락성을 되풀이 하고 있다면 틀림이 없을 것이다. 이 같은 사실은 오늘날 또다시 종교는 개혁돼야 함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은 개혁된 개신교가 더 큰 종교개혁을 요구하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면, 그날의 개혁이 진정 성서적 개혁이었는가 아니면 성서가 말하는 참 개혁이 따로 있는가를 고민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개혁의 의미, 즉 성서에서 말하는 개혁의 뜻을 깨달을 때 우리는 진정 개혁의 편에 설 수 있을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성서는 개혁의 의미와 개혁의 때와 개혁의 주체가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사람의 생각으로 판단해 부정과 부패와 타락이 왔을 때 이와 맞서 싸우는 것만이 과연 성서적 개혁이겠는가에 대해 깊이 고민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이는 신(神)의 섭리를 신의 입장이 아닌 세상적 측면에서 바라본 또 다른 오해로 봐야 할 것이다. 세상적 측면의 개혁이 요구되는 이유 또한 성서적 개혁의 참 뜻을 알지 못함으로 인해 발생하는 결과임도 함께 깨달았으면 한다.

따라서 성서가 말하는 개혁의 본질을 짚어 볼 필요가 있다고 봐진다.

예수는 초림으로 오셔서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라고 하시면서 이어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고 하신 것이다. 즉 ‘완전케 한다’는 의미는 구약이 더 이상 예언으로만 있지 아니하고 실상으로 다 이루어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임을 알 수 있으며, 이를 바로 ‘개혁’됐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인 바울은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라고 한 것처럼, 예수께서 초림으로 오셔 행하신 모든 일들은 자신의 뜻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구약 선지자들을 통해 구약에 기록해 놓은 모든 일들을 이루시기 위함이었음을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즉, 초림의 입장에선 구약은 불완전한 상태의 예언이었기에 이를 “다 이루었다”라고 하신 것처럼 성취함으로써 완전케 되는 것이요 ‘개혁’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다른 곳에서 살펴보면 “이 장막은 현재까지의 비유니 이에 의지하여 드리는 예물과 제사가 섬기는 자로 그 양심상으로 온전케 할 수 없나니,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만 되어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이라” 즉, 성서적 개혁이란 예언이 이루어진 실상을 의미하는 것이며, 개혁할 때가 있고 개혁의 주체가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중요한 것은 오늘날 개신교인들이 믿고 있는 ‘신약’ 또한 새 언약이라는 약속이요 예언이라면, 이 또한 불완전한 것이요 언젠가 이루어져 완전케 되고 개혁돼야 할 일임을 깨닫는 게 중요하다.

초림으로 오신 예수께서 하신 일은 두 가지다. 하나는 언급한 바와 같이 구약을 이루었고, 하나는 십자가 지시고 부활 승천 후 사도인 요한에게 나타나 환상으로 장래일을 알려 주었으니 장래사 곧 요한계시록이며, ‘신약은 곧 요한계시록’이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그렇다면 온갖 비유와 상징으로 기록돼 있는 이 요한계시록 또한 불완전한 예언이라면 언젠가 이루어져 완전케 되고 개혁돼야 마땅할 것이다.

요한계시록을 예언하신 예수께선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거하게 하였노라”라고 미리 말씀하신 것처럼, 때가 되면 이 요한계시록 또한 이루시고 그 이루신 것을 한 목자에게 보여주고 교회들을 위하여 증거하게 한다고 약속하셨다.

작금에 ‘동성서행(東成西行)’이란 신조어와 함께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킨 종교사에 또 다른 획을 긋는 사건이 있었다. 바로 신천지 이만희 총회장이 불완전한 예언의 상태로만 있던 요한계시록이 때가 되어 이 강산 위에서 이루어졌고 완전케 됐고 개혁된 것을 사람의 뜻이 아닌 지시하심대로 이루어지고 완전케 되고 개혁될 것을 기다려온 온 세계에 증거 전파한 성서적 대사건임을 명심해야 한다.

오늘날 진행되는 이 개혁의 역사에 참여하는 일이 성서적 개혁의 편에 서는 진정한 신앙의 길임을 꼭 기억해야만 한다. 그 길만이 부패와 타락으로부터 개혁된 개신교가 또 다시 개혁을 외칠 필요가 없이 영원히 종교사에 빛나게 될 것이며, 인류는 평화와 광복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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