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윤 소설가

위(魏)나라에 형가라는 사람이 있었다. 형가는 유세술과 검술을 익힌 뒤에 위나라 원군(元君)을 만나 채용될 것을 기대하며 자기 자랑을 늘어놓았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는 이미 여러 나라를 돌아다닐 때 유차에서 그 고장의 개섭이라는 자와 칼에 대해 논한 적이 있었다. 논의하는 도중에 개섭이 화를 내고 형가를 흘겨보자 그는 곧장 일어나 나가버렸다. 그 뒤 개섭에게 다시 한 번 형가를 초청해 보면 어떻겠느냐고 권하는 사람이 있었다.

개섭이 말했다. “전날 그와 칼에 대해 논의했었소. 그 때 마음에 들지 않은 일이 있어 눈을 흘겨 주었는데 응하겠소?” 그러면서 사람을 숙소로 보냈으나 형가는 이미 유차를 떠난 뒤였다. 또 형가는 조나라 수도인 한단에서 투전을 하다가 상대와 노름의 방법을 두고 시비를 붙었다가 조용히 떠나간 일도 있었다.

그는 다시 연나라에 도착하자 개백정이나 축(피리 일종)의 명수 고점리(高漸離) 등과 상당히 친하게 지냈다. 형가는 술을 몹시 좋아하여 날마다 개백정이나 고점리와 술집에 자주 다녔다. 그는 술이 취하면 길가에서 고점리의 축 소리에 맞추어 노래를 부르고 함께 즐겼다. 감정이 부풀어 오르면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서로 부둥켜안고 울었다.

형가는 매일 같이 술에 빠졌지만 본디는 생각이 깊고 독서를 좋아했다. 그가 돌아다닌 여러 나라에서는 모두 우수한 인물들과 교제하였다. 연나라에서도 현자로 알려진 전광(田光)에게 인정받아 친구로 교제를 나눌 정도였다.

형가가 연나라에 도착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진나라에 볼모로 가 있던 태자 단이 연나라로 도망쳐 돌아왔다. 태자 단은 전에도 조나라에 볼모로 있던 경력이 있었다. 그는 조나라에서 태어난 진(秦)나라 왕 정(政)과는 어릴 때부터 친하게 지낸 사이였다. 정은 진나라 왕위에 올랐지만 볼모로 와 있는 태자 단을 냉대하며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태자 단은 진왕 정에게 원한을 품고 도망하여 귀국한 것이었다.

연나라로 돌아온 태자 단은 진왕 정에게 원한을 풀기 위하여 보복해 줄 사람을 찾았으나 작은 연나라에서는 그럴만한 인재가 쉽게 발견되지 않았다.

얼마 뒤 진나라는 날이 갈수록 주변국들 침략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산동지방에 군사를 보내서 제, 초, 3진(한·위·조)을 공격하고 차츰 제후들의 영토를 침략하면서 연나라의 국경까지 쳐들어왔다. 연나라의 왕과 신하들은 모두 두려움에 떨었다. 태자 단은 시종인 국무(鞠武)와 상의를 하자 그가 말했다.

“진나라는 넓은 영토를 가졌으며 한, 위, 조의 영토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즉 북쪽으로는 감천과 구곡의 요충이 있고 남쪽으로는 경수, 위수의 기름진 땅을 가지고 있으며 파, 한중의 부를 독점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서쪽으로는 농, 촉 지방의 산이 가로막고 있으며 동쪽은 함곡관과 효산의 요새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인구도 많기 때문에 군사력도 강하고 무기도 많습니다. 진나라가 우리 연나라를 공격할 뜻이 있다면 우리는 바람 앞의 등불입니다. 원한을 품으면 진나라 왕의 화를 돋우는 결과가 되는데 그래도 괜찮으시겠습니까?”
“그럼 어떻게 하면 좋겠소?” 단이 국무에게 물었다. “신중하게 생각해야 됩니다.” 국무는 신중론을 내세웠다.

그런 일이 있은 뒤 얼마 되지 않아서 진나라 장군 번어기가 진나라 왕에게 죄를 짓고 연나라로 망명해 왔다. 태자 단은 그를 받아들여 집까지 내주었다. 태자는 다시 국무에게 물었다. “포악한 진나라 왕은 지금 연나라와 감정이 좋지 않은데 우리나라에서 번 장군을 보호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자 국무가 대답했다. “이것이야말로 굶주린 호랑이에게 고깃덩이를 던져주는 것과 같아서 재앙을 피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가령, 관중이나 안영과 같은 어진 인물일지라도 어쩔 수 없습니다. 지금 곧장 흉노로 보내십시오. 그러고 나서 3진과 맹약을 맺고 제나라, 초나라와 연합하여 북쪽의 선우와 강화를 맺어야 합니다. 그렇게 손을 쓰면 길은 열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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