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정치의 시즌이 도래했다. 저마다 나라를 위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자랑하지만, 문득 자기의 분수를 알고 부족한 점을 고백하는 사람이 진실하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든다. 항주(杭州)는 중국인들이 천당에 비하는 곳으로 오월(907~978)과 남송(1127~1279)의 수도였다. 두 왕조가 항주를 수도로 정하면서 서호(西湖)도 그 명성을 더욱 날리게 되었다.

특히 전류가 오월의 수도로 삼았던 70년 동안 항주는 전란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았으므로 백성들은 생업에 전념하며 평화롭게 지낼 수가 있었다. 전류는 편벽한 시골에 불과했던 항주를 발전시킨 주역이었다. 당 말은 반란으로 점철되었다. 전류는 소금을 팔면서 익힌 현실감각과 타고난 용맹으로 군문에서 화려한 명성을 날렸다. 동남방의 13개주를 통일하자, 오대(五代)시대의 첫 왕조 양(梁)을 연 주온(朱溫)은 그를 오월왕으로 삼았다. 전류는 양의 배후를 공격하자는 나은(羅隱)의 건의를 물리치면서 다음과 같은 결단을 내렸다.
“나에게는 국토와 백성이 우선이다.”

혹자는 전류가 진정으로 오월의 백성들을 생각했기보다는 세력을 더 키우면서 기회를 노렸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후 그의 정치는 치국안정에 주력한 것이 사실이다.

전류는 봉황산(鳳凰山) 아래에 자성(子城)을 짓고 국치에 전념했다. 자성에는 2개의 문이 있었다. 수비에 전념한다는 표시로 성문에 쇠로 만든 꼬챙이를 꼽았다. 전류가 성을 확장시키려고 하자 방사가 묵은 것을 고치면 왕조가 백년에 그치겠지만, 서호를 메워 왕부(王府)를 세우면 열 배는 오래 갈 것이라고 했다. 전류는 물이 없으면 백성도 없으며, 천년의 영화와 백성을 바꿀 수 없다고 대답했다. 방사의 말을 믿고 서호를 메웠더라면 항주의 지금 모습은 자취도 없었을 것이다.

전류는 수리사업에서 큰 업적을 남겼다. 전당강의 세찬 흐름과 만조의 바닷물이 부딪치면 엄청난 장관이 벌어진다. 구경하기는 좋지만 백성들은 피해가 많았다. 전류는 100여리에 걸친 방조제를 쌓았다. 바닷물이 들어와 염분이 쌓여 농사를 짓지 못했던 땅이 점차 농토로 변했다. 태호(太湖)에도 제방을 쌓았다. 소흥(紹興)의 감호(鑑湖)와 태호를 연결하는 준설공사도 마쳤다. 성에서 용금지(涌金池)까지 통하는 운하를 건설했다. 수리사업으로 절강 일대의 생산력이 급격히 향상되었다. 수로가 열리자 절강의 해운업이 발달했다. 남북으로 통하는 교통로도 원활해졌다.

오월은 일본, 태국과도 통상했다. 항주는 중국의 동남방에서 가장 큰 도시가 되었다. 육화탑 뒤에는 조수를 향해 힘차게 활을 당기는 전류의 석상이 서있다. 그 옆에는 <수호지>의 주인공 노지심(魯智深)과 무송(武松)의 석상도 있다. 후세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전설을 만들었다.
“왕이 첩설루(疊雪樓)에서 거세게 몰아치는 잔당강의 물결을 향해 5백발의 강궁을 쏘자 조수가 머리를 돌려서 드디어 서릉(西陵)으로 도망쳤다.”

수리사업이 활로 조수를 움직이는 용을 쏘았다는 전설로 변했다. 전류는 사람들의 마음에 신으로 남았다. 그는 검소했고 밤이 늦어야 잠자리에 들었으며 둥근 나무를 베고 잤다. 잠자리가 편하면 일어나기가 싫어질까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잔치에서는 몇 곡의 음악이 연주되면 곧 자리에서 일어났다. 밤새 술을 마셨다고 오해할까 염려했기 때문이다. 전류는 41년간 왕위에 있다가 81세에 죽었다. 죽기 전에 자손들을 불러서 북방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라고 당부했다. 전류의 당부를 잘 지킨 오월은 혼란한 시대적 상황과 무관하게 정치적 안정을 이룩했다.

AD 960년, 조광윤(趙匡胤)이 송을 건국했다. 오월의 통치자는 할거의 시대가 가고, 통일의 시대가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스스로 나라를 송에 바쳤다. 오월은 망할 때까지 전쟁의 피해를 입지 않았다. 지도자의 분수는 국민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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