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나름의 신앙관을 가지고 신앙을 한다. 그러나 사실은 보이지 않는 절대자에 대한 두려움이 우리로 하여금 신앙세계로 인도한다. 사도 바울은 그 절대자를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신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라고 하니, 이는 바로 하나님을 두고 이른 말씀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막연한 신앙을 하는 게 아니라 신앙을 하는 목적이 분명히 있다. 신앙인은 경서에 기록된 말씀을 믿는 것이며, 또 기록되기를 ‘구원과 영생’이라는 내세가 있으며, 그 내세관(來世觀)을 바라보고 가는 게 신앙이다.

 중요한 것은 이 같은 신앙의 목적은 어찌해야 이룰 수가 있을까에 대해서다. 세상에서도 ‘알아야 면장’이라는 말이 있듯이, 성서에도 그 절대자인 “하나님과 그 보내신 자를 아는 것”이라고 했다. 하나님은 구약성서 호세아 편에 “내 백성이 지식이 없어 망하는도다”라고 한탄했다면, 이 지식은 우주 만유를 지으신 절대자 곧 하나님의 생각과 계획, 즉 뜻을 아는 지식을 말하고 있다. 그런데 대부분의 신앙인들은 하나님을 잘 안다고 자고하며 신앙을 한다는 데 문제가 있다. 오죽하면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고 했을까를 한번 생각해 봐야 한다.

구약성서에 ‘이스라엘’이 등장한다. 이 이스라엘은 야곱이 얍복강가에서 하나님과 씨름하여 이기고 나서 받은 야곱의 새 이름이다. 그리고 야곱은 열두 아들을 통해 열두 지파를 만들고, 이 열두 지파가 구약시대 하나님의 나라(창 49:28)였다. 즉, 구약시대엔 육적 이스라엘 열두 지파가 하나님의 선민이었다. 그러나 육적 이스라엘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지키지 못하므로 하나님은 육적 이스라엘을 떠나갔다(렘 31:32, 호 6:7). 그리고 국경과 인종을 초월해 육정이나 혈통이 아닌 하나님이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는 누구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고, 이들을 일컬어 사람의 뜻으로 난 자가 아닌 하나님께로서 난 자 곧 말씀으로 난 자(요 1:1, 하나님=말씀)라고 했다. 그리고 보내심을 받은 자 곧 예수를 통해 열두 제자를 세우고(요 6:70) 이들을 다시 이스라엘 열두 지파(마 19:28, 약 1:1)라고 했으니, 이는 육적 이스라엘이 아닌 바로 영적 이스라엘이다. 또 성서의 마지막을 알리는 요한계시록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예수님과 함께하던 일곱별인 일곱 사자가 또다시 하나님과의 언약을 어기고 배도함으로 하나님은 또다시 부패한 영적 이스라엘을 떠나게 된다(계 2, 3, 6장). 그리고 예수께선 싸워 이기라고 하시고, 그 이기는 자와 함께할 것을 약속하고 이김으로 또다시 하나님의 나라와 구원이 있게 된다(계 3:12, 계 12장). 그 나라는 계시록 7장에 본 바 새롭게 창조된 이스라엘 열두 지파다. 이 이스라엘은 오늘날 기독교세상인 영적 이스라엘이 다시 부패함으로 새롭게 창조된 영적 새 이스라엘임을 알 수 있다.

정리하자면 성서에 등장하는 이스라엘은 구약시대 소아시아에 위치한 육적 이스라엘만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다. 시대마다 택한 하나님의 선민, 즉 하나님의 나라를 의미하는 상징적이며 이면적 표현임을 알게 된다. 또 시대마다 출현하는 이 이스라엘은 이김으로 이스라엘이 되고, 이스라엘은 열두 지파를 창조함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됨을 깨닫게 된다.

중요한 것은 이 마지막 때요 계시록 때인 오늘날 창조되는 ‘영적 새 이스라엘’ 하나님의 나라는 어떠한 나라인가.

하나님께선 하나님의 나라, 하늘 곧 장막을 세웠지만 부패하고 타락해 천지를 새롭게 다시 창조할 것을 이미 창세기 1장을 통해 예언해 놨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어 그들에게 복을 주고 재창조된 하나님의 나라를 다스리게 한다고 미리 작정해 놓으셨다. “여호와 곧 하늘을 펴시며 땅의 터를 세우시며 사람 안에 심령을 지으신 자가 가라사대”라고 했으니,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대로 창조되는 사람은 심령창조 곧 말씀으로 거듭난 사람들임을 알게 한다. 아니나 다를까. 계시록 시대에 창조되는 영적 새 이스라엘 열두 지파는 각 지파 일만 이천씩 십사만 사천이라 했으며, 또 이 십사만 사천은 ‘각 지파 중에서 인 맞은 자들의 수(數)’라고 하고 있다. 여기서 인(印)은 하나님의 말씀을 뜻하니, 하나님의 말씀, 즉 계시록시대 계시의 말씀으로 다시 난 자들로 하여금 창조된 나라임을 분명히 깨달을 수 있다. 그래서 구약시대부터 하나님께선 ‘민수기(民數記)’라고 하듯이 백성, 즉 선민의 ‘수(數)’를 세어 왔음을 발견하게 된다.

하나님의 역사를 육천 년 역사라 한다면, 사천 년 동안의 구약시대는 농사를 짓기 위해 황무지를 개간한 것이고, 예수 초림 때 개간한 밭에 씨를 뿌리게 하셨고, 예수 재림, 즉 계시록시대에 다 자란 밭에서 추수해 곳간에 들이는 농부의 역사임을 깨닫게 한다. 또 다르게 설명하자면 하나님은 예수 초림으로 열두 기초돌을 세우시고 재림으로 기초돌 위에 인 맞은 자의 수 열두 지파 십사만 사천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성전을 완성함으로써, 아담 범죄로 떠나가셨던 하나님은 육천 년 만에 이 땅에 하나님의 성전을 완성함으로 안식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계획이고 뜻이다.

즉, 이 땅에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는 바로 각 지파 일만 이천씩 열두 지파 십사만 사천으로 지어지는 ‘조직체’다(계 14장).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고”라고 했다면, 동방의 에덴동산은 하나님의 나라를 의미한다. 그런데 그 나라를 ‘창설(創設)’한다고 한다. 창설의 ‘설(設)’자를 보면 말씀으로 세워지는 ‘진리의 성읍이라는 조직체’임을 엿볼 수 있다.

그렇다면 완성되는 하나님의 나라는 누가 어떻게 만들어 가는 것인가.

하나님의 나라는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이 땅에 이루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늘의 것을 본 자가 있어야만 한다. 구약에서도 하나님은 모세를 불러 하늘의 것을 보여주고 본 대로 이 땅에 지으라고 명하셨다(출 25:9). 그런데 문제는 모세가 지은 성막은 모형과 그림자(히 8:5)요 현재까지의 비유(히 9:9)며, 참형상이 아니라(히 10:1)고 했다. 예물과 제사로는 양심을 온전케 할 수 없으므로 개혁할 때까지만 필요했던 것이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고 하셨듯이, 참 형상으로 오셨으며 율법을 개혁해 완전케 하기 위해 오신 분이 바로 예수다. 그리고 하늘에 올라가 보고 들은 대로 “다 이루었다”고 하시며(요 3:13, 요 19:30),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다 이루셨다. 구약을 이루신 예수님은 다시 새 언약(눅 22:20)을 하셨으니 또 이루실 일이 남아 있음을 알 수 있다. 바로 신약인 요한계시록이다. 구약을 약속하신 영이신 하나님은 예수에게 오셔서 구약을 다 이루셨듯이(요 4:24, 요 10:30), 오늘날 계시록 시대 또한 신약을 약속하신 예수가 계시록을 통해 이기신 약속한 목자를 통해 하늘의 것을 보고 듣게 한 후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는 것이다(고후 3:17, 계 3:12, 계 4장, 계 21:6).

이처럼 하나님의 나라는 저 하늘나라 어디에 막연하게 있는 것도 가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은 진리고 이치고 순리라고 하듯이 예언하시고 그 예언하신 대로 반드시 이루시는 분임을 잊어선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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