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현 주필

 
구밀복검(口蜜腹劍)이란 경구가 있다. ‘입에서 나오는 말은 꿀처럼 달지만 뱃속엔 칼이 숨겨져 있다’는 의미의 말이다. 인간의 일상생활에서 이 같은 사람의 이중성은 가끔은 아프게 경험된다. 하지만 사람의 이 같은 이중성은 정치에서 가장 극명하고 흔하게 나타난다. 선거가 있을 때 유권자들을 향한 정치인들의 말은 항상 부드럽고 겸손하고 달다. 그런데 정적에 대해서는 가차 없이 공격을 퍼부으며 뱃속에 숨겨둔 칼을 뽑아든다. ‘내 눈의 들보는 못 보고 남의 눈의 티만을 크게 보는 것’은 비이성적이고 비인격적이지만 선거판에서는 ‘검증’이라는 미명으로 그것이 최대한 너그럽게 통한다.

새누리당의 대통령 후보가 결정되고 민주통합당의 순회경선이 코앞으로 임박하면서 대선 판이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불꽃 튀는 정책 대결로 선거판이 뜨겁게 달아오른다면야 더할 나위 없이 소망스럽지만 정작 유권자들의 관심을 불꽃 튀게 잡아끄는 것은 적대 정당이나 경쟁자 간의 전방위적이고 치열한 ‘네거티브(Negative)’ 공방이다. 각 후보 진영들은 날아오는 공격은 받아치고 동시에 상대에게 타격을 날리기 위한 말하자면 ‘창과 방패’로 단단히 무장한 ‘검증 태스크 포스(Task force)’ 팀들을 운용하고 있다. 마치 정책 대결로 승부를 보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흠집 내는 네거티브로 승부를 결정지을 태세다.

벌써 몇 합(合)의 유효한 잽은 주고받았다. 여기에 일부 비뚤어진 언론들이 냉정하게 진실을 가려 주려 하는 것이 아니라 ‘얼씨구 좋아라’ 북 치고 장구 치고 심지어 어느 편을 역성까지 드는 바람에 네거티브는 확대 재생산되어 선거판은 점입가경이 되어 가고 있다. 밑도 끝도 없는 소문에는 어느 누군가를 일격에 보낼 치명적인 네거티브 카드를 어느 진영에서 비장(秘藏)하고 있다고 알려진다. 그렇다면 만약 그것이 사실이어서 터뜨려지는 날, 과연 무슨 경천동지할 일이 선거판에서 벌어질지 유권자들의 흥미는 절정을 향해 치닫는다.

네거티브에는 이렇게 짜릿한 흥행 요소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경박한 언론들은 일반이 재미있어하는 그 같은 흥행의 요소가 있는 네거티브가 터지기만을 군침을 흘리며 고대한다. 권력 앞에 초라하고 진실을 밝히는 소임에 용기를 내지 못하는 언론일수록 ‘네거티브’와의 공생을 추구하며 즐긴다. 언론이 바로 서면 나라도 바로 서며 선거판도 밝아지고 바로 설 수 있을 것 같은데 선거판의 타락만큼이나 언론의 타락상이 변화하지 않는 것이 개탄스럽다.

안철수 서울대 융합기술대학원 원장에 대한 몇 건의 네거티브 공격이 있었다. 기존의 정치권과 거리를 두고 출마 선언을 하지 않았음에도 국민의 지지가 몰리고 있는 것에 대한 기존 정치권의 신경질적인 견제구였다. 언론들의 지원사격까지 일파(一波), 이파, 삼파의 파상적인 네거티브 공세에 가세했다. 그것은 일반 국민의 눈으로 볼 때는 국민의 관심을 모으며 부상하고 있는 인물에 대한 선제적인 뭇매 때리기, 기득권 세력들의 조급함이 묻어나는 ‘이지매’였다. 미풍으로 그칠 줄 알았던 긴가민가하던 ‘안풍(安風)’이 돌풍으로 변해 기존 정치권을 초토화할지 모른다는 초조감이 표출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초조감에서 또 무슨 네거티브가 나올 것인가가 몹시 궁금해진다.

새누리당은 그가 출마를 결단할 때 박근혜 후보의 대세론을 위협할 안 원장이 찍어내려야 할 대상이다. 그가 우뚝 부상해 존재하는 지금의 상황이 새누리당에는 한없이 불편하다. 모르긴 모르지만 아마 그가 많이 미울 수도 있다. 새누리당이 안 원장에 대한 네거티브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이유가 될 것이다. 한편 민주통합당은 안 원장이 자기편인 것 같아 보이지만 자기 진영에 옮겨 놓으려 해도 꿈쩍 않는 높고 거대한 산으로만 느껴지므로 그가 버겁게 느껴질 것이 틀림없다. 그와 손잡기를 원한다고 할 때 그 산을 옮겨 놓지 못한다면 민주당이 그 산으로 다가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 산에 다가가는 것은 대승적으로 보면 큰 기회의 창출이지만 동시에 정당의 존립을 위태롭게 하는 모험이 될 수 있다. 민주당은 그 같은 고민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대통령 후보 경선에 돌입하게 된다. 이런 점에서 민주통합당의 입지도 새누리당이 배 아파할 정도로 아주 편하고 행복한 것만은 아니다. 그렇다면 두 정당은 안 원장 때문에 적어도 일정 부분 동병상련의 불편한 입장을 공유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같은 상황이 도래한 것은 더 말할 것 없이 기존 정치권의 자업자득이다. 정쟁에 매몰된 정치가 국민들의 불신을 누적시켜왔으며 국민들을 혁명적인 분노로 들끓게 했다. 정치권의 상황 인식은 여전히 안이하지만 안풍은 그 분노와 불신에서 발원했다. 그렇기 때문에 안풍은 국민 혁명의 바람이며 이는 우리 헌정사가 맞는 특별한 시대적 상황이라고 보아 무리가 없을 것 같다. 그럼에도 막상 선거판에서 나타나는 각종 정치 행위들은 시대 상황에 대한 성찰이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의 지양(止揚)을 찾아보기 어렵다. 오히려 어느 때보다 더 요란하게 춤을 추는 네거티브가 보여주듯이 구태(舊態)를 부시려는 혁명적인 상황에 맞서 마치 그에 거스르려는 듯이 구태를 되풀이 한다. 네거티브가 후보들의 진면목을 드러내는 긍정적인 효과가 일부 있을 듯이 보여도 기실 진면목을 가리고 그에 흠집을 내는 목적이 앞서는 한 전체적으로 진실을 가리는 부작용이 크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렇기에 네거티브로 혼탁해지는 구태의 선거판을 국민들은 우려의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불신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정치를 더욱 재기불능으로 만드는 정치권 스스로의 자해 행위가 되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원초적인 인간의 승부욕과 명예욕 등의 탐욕이 신랄하게 맞부딪치는 선거판에서 네거티브를 추방하기란 불가능하다. 동서고금을 통틀어 마찬가지다. 심지어 기원전 1세기 공화정 로마의 최고 집권관인 콘설(Consul)을 뽑는 선거에서도 횡행한 것이 돈 선거와 함께 상대를 모략중상하는 네거티브였다. 부정확한 정보로 자칫 빗나가면 자신의 눈과 심장을 찔러 치명상을 자초하는 부메랑이 되지만 정확한 한 방이면 최소의 비용과 노력으로 상대를 일거에 무너뜨리게 되므로 그 유혹을 뿌리치지 못한다. 그 유혹이 그런 것일지라도 정치 무림(武林)의 정치고수들에게 훈계를 한다면 가당치 않지만 바로 지금, 국민의 기존 정치권에 대한 분노가 혁명적인 상황을 조성하고 있는 이때에 자칫 허무맹랑한 네거티브는 자신에게 치명상을 가하는 부메랑이 되기 쉽다. 국민들은 네거티브의 흥행성을 즐기면서도 한편으로는 인간적인 양식이나 상식, 시대적인 상황에 비추어 그것의 당‧부당을 판별하는 일종의 측정 기재(器材)를 정치인들이 뱃속에 숨긴 칼 대신 그들 마음속에 감추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가. 안철수 원장에 대한 몇 건의 네거티브가 오히려 그의 지지율을 높여주었을 뿐이라는 것에서 뭔가는 깨닫는 것이 있을 것이다. 그는 공격의 원점에 보복 타격을 가하지도 않았고 그저 날아오는 화살에 대해 방패만으로 대응했을 뿐인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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