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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아이들이 준 싸인볼, 큰 감동이었습니다”

[천지일보=송범석 기자] 지난 2008년 북한이 미국을 꺾고 국제축구연맹(FIFA) 17세 이하(U-17) 여자축구월드컵 초대 챔피언이 됐다. 당시 북한이 첫 우승컵을 들어올리는 데 남모르는 역할을 한 (사)남북체육교류협회 김경성(53) 상임위원장은 당시를 회상하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 아이들을 13살 때부터 봐왔어요. 어릴 때 선발해서 훈련을 시키고, 자라가는 것을 봤죠. 처음부터 축구를 잘하는 아이들을 데려온 게 아니었어요. 키 크고 달리기 잘하는 아이들을 데려왔는데, 훈련 효과가 높아서 성인팀도 이길 정도였죠. 우승하고 나니, 아이들이 한푼 두푼 모아서 ‘교장선생님 감사합니다’라고 쓴 싸인볼을 저한테 주더군요. 눈물이 핑 돌았죠.”

북한 축구 선수들은 김 위원장을 ‘교장선생님’이라고 부른다. 그만큼 북한 축구와 인연이 깊다. 북한도 공로를 인정해 평양시 사동구역 장천동 35만㎡ 규모의 토지 이용승인서를 그에게 선뜻 내줬다. 특히 평양 능라도 경기장 내에는 그의 이름을 딴 ‘김경성 체육인 초대소’가 들어서 있을 정도다.

현재 김 위원장은 중국 윈난성 쿤밍시 홍타스포츠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언론에도 자주 회자되는 이 센터는 전지훈련장으로 각광을 받는 장소다. 중국과의 특별한 인연으로 이 센터를 운영하게 된 그는 북한 축구단에게 훈련을 지원했던 것이 인연이 돼 북한 축구 선수들을 2004년부터 훈련시키게 됐다.

그 뒤로 남북 체육 교류라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지난 2006년 김 위원장은 태국 킹스컵 청소년 대회에 남북 단일팀을 내보내기로 했다. 워낙 비용이 많이 들어가기 때문에 통일부에 지원 자금을 받고, 후원금도 받아야만 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2006년 10월 9일 북한이 핵실험을 한 것이다. 대회까지 불과 1주일을 앞둔 시점이었다. 당장에 기업 후원금이 다 회수됐다. 통일부는 대북제재에 들어갔고, 사업 지원 자금도 정부에 다 돌려줘야 했다. 이미 비용은 다 쓴 후였다. 수중에 있는 돈을 쓰고, 나중에 후원을 받기로 했는데, 그 돈을 받지 못하게 된 것이다. 김 위원장은 그 십자가를 고스란히 혼자 짊어져야 했다. 자신이 운영하던 스포츠마케팅회사 I&T가 부도를 맞았고, 살던 아파트까지 넘어가 가족은 길거리에 나앉을 판이었다.

“힘들었습니다. 부도도 부도지만, 주위의 시선이 너무 따가웠어요. 왜 시키지도 않은 일을 해서 잘 나가던 사업을 다 망하게 만들었느냐고 했죠. 북한과 무슨 깊은 모종의 관계를 맺고 있는 게 아니냐는 이야기도 나왔어요. 저를 믿고 따라와 준 가족에게 가장 미안했어요. 그래도 그렇게 끝낼 순 없었어요. 그때 어떤 사명감이 저를 잡아준 것 같습니다.”

이후 김 위원장은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하고 남북 교류를 이어간다. 2008년에는 현 정부 최초로 통일부에서 협력사업승인을 받아 평양공단 개발사업을 시작했다. 그런데 또 문제가 터졌다. 평양 대동강공장 건물이 80%정도 완성될 시점인 2009년 4월 5일 북한이 광명성 2호를 발사한 데 이어, 2010년 3월 26일 천안함 사건이 터진 것이다. 이로 인한 정부의 5.24 조치로 평양공단 건설사업 및 평양공단 개발사업은 전면 중단된다. 이쯤 되면 질려서 포기할 법도 하련만, 그는 계속 사업을 이어갔다. 그 결실이 지금 운영되고 있는 단둥(丹東, 중국 국경도시)의 축구화공장이다.

“단둥 축구화공장은 그저 돈이나 벌자고 세운 게 아닙니다. 5.24 조치라는 극한 상황 속에서 남한의 자본, 중국의 경영, 북한의 노동력이 만난 새로운 패러다임의 남북경협사업입니다. ‘남북경색이라는 꽁꽁 얼어붙은 얼음 밑으로 흐르는 작은 희망의 물줄기.’ 저는 이렇게 의미를 부여합니다.”

김 위원장에 따르면 북한 기술자들은 손기술이 아주 좋다. 동남아에서 만든 것과는 비교가 안 된다고 설명했다. 특히 인건비가 싸기 때문에 가격 경쟁력이 뛰어나다. 선수용 축구화가 10만 원을 넘지 않는다. 향후에는 국내 유통망을 확보하겠다는 포부도 내비쳤다.

축구화에서 다시 화제를 돌렸다. ‘리스크가 큰 남북 사업을 왜 이렇게 고집스럽게 계속 하느냐’고 묻자 그는 그저 허허 웃었다. 그리고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다.

“처음부터 북한에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에요. 어쩌다 보니까 북한 축구 선수들을 만나게 됐고, 어쩌다 보니까 남북 협력 사업을 하게 됐어요. 그런데, 말이죠. 하다 보니까, 이게 그저 사업이 아니란 걸 느꼈어요. 남북통일 기반을 만드는 데 이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는 걸 알았어요. 그리고, 생각을 해보세요. 알다시피 우리나라는 자원이 없어요. 장기비전이 있어야 한다는 거죠. 남한의 자본과 기술, 북한의 노동력과 자원이 만나는 미래 비전이 있어야 해요. 그게 지금 제가 하는 일이에요. 물론 힘들어요. 그런데 쓰러질 수는 없어요. 내가 쓰러져 버리면 누가 이 작은 불씨를 살려가겠어요. 그 사명감 하나가 저를 붙잡고 있어요.”

김 위원장은 그러면서 “남북문제를 풀어가려면 정치‧군사 문제 위주에서 벗어나야 한다”며 “어려운 문제를 나중에 해결하고 쉬운 것부터 풀어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대만하고 중국 사례를 들 수 있어요. 두 나라는 한때 남북한보다 훨씬 심각한 갈등에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1992년에 구두상 합의로 ‘하나의 중국, 각자 해석(One China, Different Interpretation)’이라는 원칙을 세웠습니다. 이후에도 물론 군사‧정치적 충돌은 있었지만 그들은 현안을 각자에게 유리하게 해석하면서 큰 충돌을 피했습니다. 그러면서 문화‧체육‧관광‧경제 협력은 계속해왔죠. 그 결과를 보세요. 지금 양쪽에서 일주일에 비행기가 500편씩 뜨고 수천 명이 교류를 하고 있습니다.”

요지는 이렇다. 중국과 대만은 양측의 정치를 놓고 볼 때 국민적 저항이 심해서 통합이 불가하다. 그래서 정치 문제는 논외로 하고 접근이 용이한 문화‧체육‧관광‧경제 협력을 계속하고 있다. 결과적으로는 이러한 협력이 정치 군사 충돌을 제어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말이죠, 가장 어렵다는 정치‧군사 문제를 앞세워 모든 걸 중단하고 있어요. 그러니 누가 북한에 자본을 투입하겠습니까? 남북관계가 일시적으로 좋아지는 것이 문제가 아니에요.”

특히 북한을 경제 파트너로 봐야 한다는 점을 그는 거듭 당부했다.

“그들의 생각은 읽지 않고 계속 북한을 지원대상으로 보면 안 됩니다. 북한과 ‘경제 협력’을 해야지 줄곧 북한을 지원대상으로 보니까 정치적으로 흘러가는 거죠.”

그러면서 그는 북한이 변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 변화의 시기에 북한의 입장을 이해하고, 북한과 어떤 형태로 협력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한쪽이 일방적으로 원하는 것만 제시하고 강요한다면 이야기가 될 수 없습니다. 북한은 분명 변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변화를 읽어야 해요. 지금 이 시점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또 고민해야 합니다. 탱고는 혼자서는 출수 없습니다. 두 사람이 함께 손을 잡고 스텝을 밟아야 합니다. 지금이 그 탱고를 출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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