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많은 지식인들이 나름의 자기 지식을 뽐낸다.

 

흔히 이르기를 이 시대를 표면적이든 이면적이든 ‘말세’ 또는 ‘종말’이란 말을 쉽게들 하고 있다. 인류 세계사를 보더라도 어느 시대고 이처럼 혼란한 상태는 늘 있어 왔으며, 그럴 때마다 많은 것을 연구해온 지식인들 즉, 정치 사회 종교 문화 등 그 어떤 장르를 막론하고 자기 분야에서 많은 것을 연구해 온 소위 최고라고 하는 식자들 간의 치열한 논쟁은 항시 뜨거웠다.

그러나 미안하지만 많은 노력의 대가라는 부분에선 인정해 줄 수 있지만, 그 논리가 진리(眞理)가 될 수는 없다. 다시 말해 언제든지 다른 사람에 의한 다른 주장이 나올 수 있는 여지를 항시 안고 있기에 진리 대신 ‘론(論)’과 ‘설(說)’이라 평가절하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이라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제 중요한 것은 이론과 설이 미치는 영향에 있어 세상 학문도 물론이거니와 종교적 측면에선(주석) 아주 심각한 결과를 초래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너무나 간과해 왔던 것이다.

이쯤에서 AD 1세기경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 아테네를 방문했을 때를 기억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어떤 에비구레오와 스도이고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쌔 혹은 이르되 이 말장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뇨 하고 혹은 이르되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 하니 이는 바울이 예수와 또 몸의 부활 전함을 인함이러라, 붙들어 가지고 아레오바고로 가며 말하기를 우리가 너의 말하는 이 새 교(신흥종교)가 무엇인지 알 수 있겠느냐”는 신약성서 사도행전 17장에 등장하는 대목이다. 바울은 그리스의 유서 깊은 아레오바고의 작은 언덕에서 당시 그리스의 철학자들과 심한 변론을 하고 있음을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다. 이제 살펴 볼 것은 바울이 쟁론하는 상대 즉, 당시 철학자들이 있게 된 시대적 배경인 것이다.

‘철학(哲學)’ 하면 그리스 철학을 떠올린다. 또 그리스 철학 하면 BC 5세기 중엽 아테네를 중심으로 소크라테스를 시작으로 플라톤을 이어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종합된다. BC 4세기경 아리스토텔레스가 죽은 후 헬레니즘 철학으로 넘어가게 된다.

다시 말해 아리스토텔레스 등에 의해 진행돼 오던 그리스 아테네의 순수이론철학은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대왕의 그리스 침략을 계기로 헬레니즘 철학이 형성됐다. 이후 알렉산더대왕의 동방원정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는 물론 페르시아, 인도 등 그야말로 동·서양의 복합문화가 형성되었으니 이를 ‘헬레니즘’이라 부르게 되었던 것이다. 또 아리스토텔레스의 ‘순수 그리스 철학’과 구분해 ‘헬레니즘 철학’이라 했다.

이처럼 갑작스런 정치 사회 문화의 변화에 따른 불안으로 개인주의와 현실도피주의가 팽배해졌고, 그 선상에서 에피크로스학파와 스토아학파 등이 중심을 이루는 새로운 철학 사상이 등장하기에 이른다. 즉, 에피크로스학파는 인생의 목적은 행복이고 그 행복을 ‘쾌락’이라고 보는 ‘쾌락주의’와 무신론적 이론을 주장했으며, 스토아학파는 행복은 ‘금욕’의 상태, 즉 ‘금욕주의’를 주장하며 범신론을 주장했으며, 이 스토아학파는 훗날 평등을 주장하는 기독교사상에 깊은 영향을 주게 된다.

그리스는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다시 로마에 병합된다. 결국 사회 문화 등 정신적 혼란 상태에 빠지게 되면서, 인간은 스스로 정신적 안정을 가져 올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결국 초자연적 신을 찾게 되고 신에 의해 구원받기를 갈망하기 시작하기에 이른다. 때마침 ‘모든 길은 로마로’라는 말이 생겨나듯이 세계통일의 기치아래 로마제국 건설에 나선 로마는 동방종교가 유입되기 시작했고, 이를 계기로 기존의 사상과 종교는 유입된 동방사상과 종교가 혼합되면서 신문화와 사조를 탄생시켰다. 이는 결과적으로 기존의 헬레니즘문화를 또다시 무너뜨리고 새로운 문화 즉, 다신론(多神論)적인 종교성이 짙은 문화를 낳고 말았던 것이다.

이러한 그리스의 역사와 함께 이어온 사연이 지금 바울과 쟁론하는 그리스 철학자들을 있게 했고, 그들을 향해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의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바로 그리스의 역사가 그들 즉, 당시 철학자들을 있게 했음을 엿볼 수 있어야 하며,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라는 말은 그 시절의 종교성을 잘 대변해 주고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이제 말하고자 함은 그 시절이 아니다. 바로 오늘날이다. 물질만능주의, 세계의 문명과 문화가 혼합되고 충돌하면서 인류는 또다시 혼란이 찾아온 것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수많은 지식과 철학과 종교가 그 시절 아레오바고 언덕에서의 쟁론을 재연(再演)하고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그러나 이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 뿐임을 잊어선 안 된다.

그것은 세상의 지식도 철학도 주석도 아닌 ‘명철(明哲)’임을 말이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범사에 종교성이 많던 그 시절, “알지 못하고 위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라고 바울이 말한 것처럼, 오늘날도 모두가 하나님을 믿는다고는 하나 자신들도 모르는 ‘가짜 하나님’을 믿고 있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고 하신 바울처럼 ‘참 하나님’을 알게 할 때 바로 보고 믿는 귀한 역사가 일어나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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