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고 순수하고 깨끗하지 못한 상태를 혼합되고 혼탁한 상태라 일컫는다. 이 말을 달리 해 보면 ‘섞였다’는 의미가 되어 흔히 바벨(Babel)이란 용어로 대신한다. 특이한 것은 이 바벨이란 용어는 바벨탑․바벨론 등과 함께 기독교적 용어로 통용되어진다.  

이 바벨의 원인은 욕심과 교만의 산물임을 경서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바벨의 결과는 참혹한 심판뿐임을 종교적 관점에서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다.

이를 한마디로 설명해 놓기를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고 사도 바울은 정리해 놨다. 이처럼 욕심으로 인해 아담이 범죄한 이후 오늘날까지 죄의 유전자로 이어진 종교의 역사 아니 인류의 역사는 곧 바벨의 역사였으며 죄의 역사였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 시대 종교는 굳이 기독교만을 겨냥하는 것은 아니다. 어느 종파를 막론하고 바벨탑 쌓기를 주저하지 않고 있으니, 이 시대야말로 ‘영적 바벨론’이 됐음을 양심이 있고 눈과 귀가 있다면 억지로 부인하진 말아야 할 것이다.

성서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성서는 만인이 읽어야 할 책이며, 우리 삶의 기준이 된다는 사실에서 착안했다는 점을 이해했으면 한다. 구약성서에 바벨론이 등장한다. 이 바벨론은 육적 선민 이스라엘을 사로잡아 멸망시킨 이방 나라다. 그런데 신약에 보면 요한계시록에 바벨론이 또다시 등장하고 있다. 이 대목에서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은 뭘까. 성서에 등장하는 바벨론이 갖는 의미는 선민을 멸망시키는 이방나라를 대신하는 상징적 의미를 가졌음을 깨닫는 게 중요하다. 구약시대 존재했다 사라진 나라가 계시록 시대에 또다시 존재할 리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신약인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바벨론은 오늘날 이 시대에 하나님의 영적 선민을 사로잡고 있는 이방 즉, 영적 바벨론이 또다시 존재하고 있음을 깨닫게 한다. 문제는 선민을 사로잡아 멸망시킨 이방 바벨론은 불교도 이슬람교도 불신자도 아닌 오늘날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자처하며, 온갖 주석으로 교리 장사를 하고 있는 소위 자칭 정통이라고 주장하는 정통교회라는 데 충격을 주고 있다.

또 놀라고 놀랄 일은 천사가 이 바벨론을 설명하기를 “힘센 음성으로 외쳐 가로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의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며 온갖 잡새가 모인 귀신의 처소 바벨론은 무너진다고 하는데, 이 말은 천사의 말이니 참된 말일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을 말세(末世)라고 흔히들 얘기하지만, 그 말세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촌의 종말이 아니며, 바벨이 돼 부패하고 타락한 소위 정통이라고 큰소리치는 종교(기독교)세계의 종말임을 자신들이 늘 들고 다니며 또 믿고 있는 성경과 하나님과 예수님이 분명하게 증거하고 있으니 필자도 어쩔 수 없지 않은가.

거듭 말하고 싶은 것은 이 세상이 혼탁한 것은 종교가 혼탁한 탓이다. 종교를 믿는다는 것은 각기 믿는 종교의 경서를 믿는 것이며, 그 경서의 뜻이 무엇인지를 안다면 오늘날과 같은 참혹한 현실은 오지 않았을 것이다.

성서에 보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고 잠언(箴言)하고 있다. 한마디로 이 말은 자신이 믿는 신을 두려워하고 존경할 수 있는 근거는 신의 뜻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며, 그 아는 것을 명철이라고 하고 있다. 바로 오늘날 바벨된 종교의 원인은 이 같은 잠언을 경시한 신앙의 결과임이 틀림없다.

여기서 잠시 성서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살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아이러니 한 것은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 명철이라고 하면서도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창세부터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리라…”고 기록된 것을 보아 하나님은 창세기는 물론 선지자들을 통해 기록한 하나님의 말씀 속엔 뭔가 비밀이 있음을 깨달을 수 있다. 그런데 이 비밀에 대해서 이천 년 전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말씀을 보면, 창세부터 감춰진 비밀을 누구나 듣고 쉽게 이해될 수 있게 드러내는 게 아니라, 비유로 드러낸다고 했다면 그 이유는 뭘까. “그러므로 내가 저희에게 비유로 말하기는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고 했다면, 뭔가 듣고 깨달아 하나님의 역사를 훼방하는 즉, 들어서는 안 될 ‘저희’라는 존재가 있기에 깨닫지 못하게 하기 위함임을 눈치 챌 수 있다. 물론 이 모든 일은 “내가 입을 열고 비유를 베풀어서 옛 비밀한 말을 발표하리니”라고 기록된 시편 기자의 예언이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임도 잊어선 안 될 대목이다.

문제는 여기서 끝날 일이 아니다. 이렇게 초림으로 오신 예수께서 구약을 이루시고는 십자가를 지시고 가시면서 “이것을 비사로 너희에게 일렀거니와 때가 이르면 다시 비사로 너희에게 이르지 않고 아버지에 대한 것을 밝히 이르리라”고 하셨다는 사실이 너무나 중요하다.

즉, 아담 범죄로 말미암아 사단이 주관하는 죄의 세상에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밝히 드러낼 수 없었고, 그 뜻은 하나님의 계획대로 초림과 재림이라는 노정이 필요했고, 모든 뜻과 계획이 밝히 드러나는 그 날이라는 한 때가 필요했고, 오늘이 바로 ‘그 날’이라면 예수께서 약속한 보혜사를 통해 하나님의 뜻이 더 이상 비유도 비사도 상징도 아닌 완전히 밝히 드러나고 있는 때임을 잊어선 안 된다. 정작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이 밝혀지는 때가 됐다 하더라도 계시(“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를 받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이 계시를 받음으로써 비로소 성경의 결론이요 구원의 열쇠라고 할 수 있는 요한계시록의 세 가지 비밀인 배도자와 멸망자와 구원자의 비밀을 알게 되고 구원자(“…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에게로 올 자가 없느니라”)와 함께하는 참 하나님(“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을 알게 되니 곧 신앙의 목적은 이루어지는 것이다.

누구든지 진정 신(神)의 존재를 믿고 참 신앙의 길을 원하는 자라면, 지금이야말로 납작 엎드려 말씀으로 신앙을 회복할 때라는 사실을 명심 또 명심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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