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현 주필

 
풍선은 일단 터지면 다시 부풀지 않는다. 비누거품이나 물거품도 마찬가지다. 풍선처럼 모양 좋게 부푸는 거품, 흔히 말하는 버블(Bubble)은 일단 꺼지면 다시 원래의 예쁘고 둥그런 모습으로 되돌아가지 않는다. 안철수 교수에 대한 여론 지지율의 추이는 대단히 견고하다. 그럼에도 그것을 거품일 뿐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없지 않다. 그가 정당의 배경이나 정치세력의 뒷받침이 없다는 측면에서 그 말에 동의할 수 있는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냉정하고 신중하게 본다면 거품일 뿐이라는 말의 진의(眞意)와 객관성에 신빙성이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안철수 교수의 고공 행진하는 여론의 지지율은 기존 정치권에 실망하고 화가 나있는 일반 국민에게는 신나는 일이다. 그렇지만 그가 만약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다고 했을 때 그와 겨루어야 하는 정치 라이벌들에게는 버겁고 두려운 일일 것이 틀림없다. 그의 지지율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는 주로 이 같은 안 교수의 라이벌 진영에서 나온다. 그렇다고 볼 때 그 같은 평가에는 진영의 논리가 지배하는 아전인수(我田引水)나 견강부회(牽强附會)가 섞여 있게 마련이다. 자기 진영(陣營)의 전의를 꺾지 않고 어떻게든 돋우어야만 하고, 상대의 우세를 인정함으로써 여론이 더욱 그 추세에 편승하는 이른바 밴드웨건 효과(Bandwagon effect)를 상대에게 넘겨주지 않기 위해 그 같은 객관성을 벗어난 무리는 감행되기 마련이다. 그것은 일종의 ‘네거티브(Negative)’다. 상대를 폄하하는 그 ‘네거티브’는 국민의 생각을 거슬릴 때는 네거티브 전술을 구사하는 쪽에 자해 행위가 된다. 그렇지만 그 판단은 네거티브 전술을 구사하는 바로 그 사람들 자신의 몫이 될 뿐이다.

주목해봐야 할 것은 이런 것들일 것 같다. 안철수 교수에 대한 지금의 높은 여론 지지율은 국민들 대부분이 처음 그렇게 보았던 것과 달리 그렇게 쉽게 그리고 얼른 꺼지지를 않는다. 그의 지지율은 어느 순간 생겼다가 허망하게 꺼져 다시 부풀어 오르지 않는 거품과 같은 것이 아니라 그저 줄었다 늘었다 하는 신축성을 지닌 재질의 어떤 것처럼 보인다. 그의 지지율이 잠시 주춤거린 때가 있었다. 대통령 선거에 ‘나온다’ ‘안 나온다’에 대한 명확한 대답을 기다리는 국민의 조급증을 그가 흔연하게 풀어주지 못한데서 오는 피로감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피로감에도 여론의 지지율은 피로를 느끼지 않고 도리어 탄력을 받아 고공 행진을 계속하고 있다. 그 점을 국민들은 새삼스럽게 주목하기 시작했다. 확실히 그것은 주목거리가 되는 것이 분명하다.

안철수 교수는 주춤거리던 그의 지지율을 일거에 다시 일으켜 세웠다. 그 나름의 현실을 보는 안목과 비전을 담은 책의 저술과 TV 출연과 같은 한두 가지 이벤트만으로도 여론 지지율면에서 다른 대통령 후보들 모두를 순식간에 제치고 압도할 수 있었다. 그의 인기와 여론의 지지율은 가파르게 치솟아 여야를 통틀어 가장 강력한 라이벌 후보와의 양자 구도에서 승리할 수 있는 것은 물론 기존 정치 세력과 연대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나온다고 할 때의 3자 구도에서도 이길 수 있는 것으로 지지율이 나타났다. 그의 지지율이 거품뿐이었다면 이런 일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볼 때 그의 지지율은 분명 살아 움직이는 에너지를 지녔다. 그것이 신기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그 비결이 그 자신과 국민에게서 찾아질 수 있는 것이라면 결코 신기한 것이 아니다. 과연 그 비결이 과연 뭔가 하는 것은 사실 대단히 상식적이다.

그는 정당의 배경이나 정치 세력이 없다. 그를 뒷받침하는 것은 아직까지는 단지 비조직적이고 막연한 국민의 힘 또는 대중의 힘(People's power)일 뿐이다. 그 힘은 국민이나 대중이 갖는 기존 정치권에 대한 불신의 깊이만큼이나 높이가 같다고 보면 될 것 같다. 그 불신이 안철수 교수의 꺼지지 않는 지지율에 대한 비결을 설명해주고도 남는다. 국민이나 대중은 고요할 때는 고요하지만 거칠 때는 무섭게 사나운 바다와 같다. 잔잔할 때는 그 물이 배를 띄우지만 화가 나면 배를 뒤집기도 하는(수능재주 역능복주/水能載舟 亦能覆舟), 바다와 같은 무서운 에너지를 지닌다.

역사적인 사례를 들먹일 것도 없이 국민이나 민중은 모래알 같고 실체가 없는 것 같지만 일단 충동적으로 움직이면 그 힘이 걷잡을 수 없는 것임을 실감하게 된다. 이처럼 안철수 교수에 대한 높은 지지율을 성난 민심의 반영이며 그것의 작용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고 보면 적어도 기존 정치권이 안철수 교수를 뛰어넘을 만큼의 신뢰를 국민들로부터 회복하기 전에는 안 교수의 지지율을 절대로 거품이라고 할 수가 없는 것이 자명해진다. 따라서 기존 정치권의 후보들은 안철수 교수를 너도 나도 나서 때리는 정치적 이지메나 네거티브가 급한 것이 아니라 국민의 신뢰를 회복할 수 있는 환골탈태의 노력을 앞세우는 것이 급선무일 것이다. 

안철수 교수 라이벌 진영의 어떤 이는 그가 ‘성인인 척 하지만 곧 판명이 날 것’이라고 했다. 이는 지독한 인격모독이며 네거티브의 성과를 장담할 수 없는 지나친 네거티브다. 솔직히 너무 나간 느낌이 든다. 안철수 교수가 성인인 척 했으면 그의 높은 지지율은 벌써 물거품 사라지듯 꺼져버렸을 것이 아닌가. 이렇게 네거티브가 지나치면 국민의 눈에 네거티브가 각인되는 것이 아니라 포지티브(Positive)한 면이 더욱 부각되는 역효과가 나온다. 그러니까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안철수 교수는 성인인 척 하기는커녕 국민의 입장과 눈높이에서, 국민의 애환과 고락을 함께 하려는 진정성을 보여주는 소통으로 국민으로부터 호감을 얻었다’고 할 수 있는데 이에는 뭐라고 네거티브한 응수를 할지가 궁금하다. 국민은 바보가 아니다. 진솔하고 소탈한 면모가 아니고 ‘뭐인 척’해서는 절대로 지지율을 견고하게 유지하지 못한다.    

아무리 선거판이라 해도 상대의 단점을 들추는 것이 보기 좋은 모습만은 아니지만 정치 마당이기에 불가피한 측면이 있고 그것은 또 검증이라는 이름으로는 대부분 용납이 된다. 정치 네거티브에 능한 정치의 달인들이 바로 그 검증이라는 명목으로 정치의 ‘나쁜 경험’이 없는 비정치권의 선두 유망주자 안철수 교수에 대해 정치 이지메에 나섰다. 그것이 마치 까마귀 떼와 백로 한 마리의 싸움처럼 국민에게 비칠 때는 국민들은 누구의 편을 들겠는가. 백로의 편을 들기 쉽다. 그렇게 되면 자칫 까마귀 떼와 백로 한 마리의 싸움은 까마귀 떼와 국민들의 싸움의 양상으로 바뀔 수도 있지 않은가. 어떻든 두고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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