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무형문화재 제30호 옹기장 배요섭 선생 [사진=이현정 기자]. ⓒ천지일보(뉴스천지)

미국 현지서 최초 한국식 전통 가마 선보여
도자기술 우수성 알린 숨은 ‘한류’ 주역

‘1977년 납 파동’ 사라질 위기의 옹기문화
5년간 외로이 법정 투쟁 벌여 지켜내

[천지일보=김성희 기자] “요즘은 옹기 쓰는 사람이 많지 않아요. 플라스틱 같은 합성수지 제품이 넘쳐나지 않습니까. 하지만 자연 재료로 만든 옹기는 숨을 쉬는 그릇이라 근본부터 다르지요.”

10여 년의 연구 끝에 8.15 광복 후 사라졌던 푸레도기을 재현한 서울 무형문화재 제30호 배요섭(86) 옹기장. 고령의 나이에도 시민과 관광객을 대상으로 푸레도기를 시연하며 옹기문화를 알리고 있는 그를 지난 14일 찾아가 반세기가 넘는 장인의 삶에 대해 들어봤다.

비 개인 오후 한옥의 고즈넉함이 살아있는 서울 종로구 북촌동 무형문화재 교육전시장. 약속한 시간보다 일찍 도착해 툇마루에 앉아 있던 중 아흔을 바라보는 고령에도 힘찬 걸음으로 들어서는 배요섭 선생이 기자의 눈에 들어왔다.

그가 빚어내는 푸레도기를 닮은 푸른색 작업복을 입은 그는 전시장에 들어서자마자 물레 앞에 앉아 거침없이 옹기 성형과정을 시연해 보였다.

“푸레도기 역사는 가야‧신라시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조선시대에 와서는 천일염을 사용해 단단하고 윤이 나는 그릇으로 제작돼 왕실에서 사용했지요.”

◆5대째 가업 이어온 옹기 집안
배 선생의 집안은 할아버지인 故 배치봉 옹부터 가업으로 옹기를 빚어온 옹기장 집안이다. 일제징용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아버지인 故 배순용 옹과 이리저리 떠돌이 생활을 하던 그는 초등학교를 졸업하던 16세 때 할머니의 권유로 옹기제작에 뛰어들었다.

“할머니께서 학교를 졸업하고 나니까 ‘논 열 마지기보다 옹기 만드는 일이 더 낫다’면서 옹기 만드는 걸 배우라고 하셨어요. 그때는 전쟁으로 식량이고, 물건이고 다 귀한 시절이라 옹기도 없어서 못 팔았지요.”

배 선생은 당시 하루에도 사람 키보다 큰독을 몇 개나 구워 팔며 호황을 누렸다고 한다. 하지만 플라스틱 제품이 생산되면서 옹기는 설 땅을 잃어갔다.

◆납 파동 사건 후 법정싸움 5년 만에 무해판정
전쟁 후 일반인에게도 큰 인기를 누리며 승승가도를 달리던 옹기업체에 엄청난 타격을 입힌 사건이 발생했다. 1977년 발생한 ‘옹기 납파동 사건’이다. 이해관계에 얽힌 보사부에서 터뜨린 ‘광명단 사건’은 다른 용기 기준치에 비해 터무니없는 수치인 0.1㏙.을 옹기에 적용했다.

“옹기에 0.1㏙.이 넘는 납이 들어있다고 문제가 됐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이 문제 삼은 납의 양은 소금의 0.3㏙ 도자기의 7㏙보다도 적은 수치였어요.”

이 사건으로 사람들이 옹기에 등을 돌리자 배 선생은 옹기 만드는 일을 포기하고 싶었다고 고백했다. 하지만 할아버지부터 시작된 가업이었고 옹기에 대한 자부심과 애정은 그를 움직였다.

평생 옹기에만 매달린 그는 학력도 초등학교 졸업이 다였기에 수십 장이 넘는 소송문서와 과학적 근거를 들어 무해함을 증명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5년간의 긴 투쟁 끝에 그는 옹기에 들어있는 납이 무해하다는 판정을 받아냈다.

다시금 옹기의 우수성이 세간의 집중을 받기 시작했다며 미소를 짓는 그는 천상 옹기장이었다.

◆미국에 우리 도자기술로 ‘옹기제조’ 가능성 심어주다
배 선생은 미국 공예가를 위해 열린 워크숍에 1986년부터 1992년까지 4차례나 참가했다. 당시 일본도자기 기술만 알려져 있던 미국에서 그는 한국 전통 옹기문화를 선보여 찬사를 받기도 했다.

“옹기 중에서도 대독은 기술이 필요합니다. 미국에 방문했을 때 대독을 만들어 보이자 사람들이 신기해하며 몰려들었어요. 사람 키보다 높은 큰 독을 밑단에서부터 같은 두께로 쌓아 만드는 기술이 그들에게는 생소했지요.”

배 선생이 대독을 만들어 보이자 ‘원더풀!’을 외쳐대던 외국인들은 물레에 만들어진 큰 독을 광목 띠로 가뿐히 들어 건조장으로 옮기자 다시 놀라움에 입을 벌렸다. 이 모습을 보며 그는 우리 문화에 대한 자신감을 얻었다고 말했다.

그는 1987년 미국 오레곤주 포틀랜드 현지에 옹기가마를 지었다. 또 이듬해 NCECA ‘East meets West’에서 홍재표, 윤광조, 유효웅 씨와 함께 한국 전통도자워크숍과 세미나 등에 참가했다. 이 행사는 한국 전통도예를 공식적으로 알리는 문화외교의 장이 됐다.

하버드 대학교를 비롯해 8개 주 20여 개 대학을 돌며 옹기제작 시연을 진행한 그는 테네시 주에서 명예시민상을 받기도 했다.

“미국인들에게 설계도 하나 없이 가마를 쌓는 모습이나 광목 띠로 자리옮김하는 것을 보여주면서 대량생산과 대독을 빚어내는 법 등 한국식 옹기제조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을 심어줄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명예시민상을 주면서 미국에 남으라고까지 했으니. (웃음)”

◆서울 마지막 옹기장…아들·손녀 가업 잇다
옹기는 한국의 전통문화다. 하지만 정작 그 기법을 배우고 싶어 하는 사람은 한국인보다 외국인이 더 많다. 대학에서 도예를 공부하는 학생들이 푸레도기를 배우겠다고 찾아오곤 하지만 며칠을 못가 줄행랑치기 일쑤다.

“옹기 빚는 일은 여간 힘든 게 아니에요. 흙덩이 하나도 무게가 엄청납니다. 옹기보다 힘쓰는 일이 적은 도자기 공예인들이 푸레도기를 배우겠다고 찾아오지만 끝까지 남아 있는 사람이 없어요.”

실제로 인터뷰 도중 흙덩이를 물레에 올려놓으며 들어보라는 그의 권유에 자신만만하게 도전했던 기자는 ‘헉’ 소리를 내며 팔을 부들거렸다. 낮잠 잘 때 베는 목침 크기의 흙덩이는 보기와 달리 3~4㎏은 훌쩍 넘을 듯했다.

지하철을 타고 전시장에 나올 때마다 흙을 직접 배낭에 지고 온다는 배 선생에게서 장인의 면모가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내가 죽고 나면 이 옹기를 빚을 사람이 있을까 싶었어요. 다들 힘들다고 도망가기 바쁘니까요. 그런데 둘째 아들에 손녀들까지 나서 푸레도기를 빚겠다고 하니 말은 하지 않았지만 참 대견하고 고맙죠.”

현재는 3대째 가업을 이어 옹기를 빚어온 배요섭 선생의 뒤를 이어 둘째 아들인 배연식 씨가 국가지정 푸레도기 제작 기능 전승자로 활동하고 있다. 또 두 손녀인 배은경, 배새롬 씨도 아버지인 배연식 씨와 함께 무형문화재 이수자로 5대째 가업을 이어가고 있다.

진정한 장인정신으로 가업을 이어온 옹기장 배요섭 선생과 그 후손들. 그들의 옹기 사랑은 집안의 가업을 넘어 우리 전통문화의 맥을 이어가는 진정한 산 문화재였다.

“도자기는 하나의 예술작품이지요. 하지만 옹기는 우리 역사이자 생활입니다. 없어져서는 안 될 소중한 전통이에요.”

옹기를 이야기하며 어린아이같이 빛나던 배 선생의 눈빛 속에는 70여 년 가까이 옹기만을 바라본 사람이 품을 수 있는 무한한 애정이 느껴졌다. 그리고 깊게 팬 주름 가득한 그의 얼굴에선 검푸른 푸레도기와 같은 단단함과 투박하지만 멋스러움이 엿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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