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열린 강릉단오제에서 빈순애 무당이 세존굿을 하며 바라(악기)춤을 추고 있다. (사진제공: 강릉단오제보존회). ⓒ천지일보(뉴스천지)

“문화재 단오굿, 예술적인 측면 많아”

[천지일보=김현진 기자] 우리에게 무당은 어떤 존재로 다가올까. 현재 우리 사회에서 무당은 무서우면서도 약간은 천박한 직업이라는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국가중요무형문화재(제13호)이자 유네스코 지정 세계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강릉단오제를 통해 선보여지는 20여 개의 단오굿은 대중에게 무당을 친근하게 생각하도록 하고 있다.

지난달 막을 내린 강릉단오제에는 150만 명의 관람객이 방문해 1천년의 역사를 가진 강릉단오제를 즐겼고, 끊이지 않고 울려 퍼지는 흥겨운 가락소리를 담은 굿판은 사람들의 이목을 단연 집중시켰다. 특히 대다수 할머니·할아버지들이 좋은 자리를 차지해 열심히 경청하면서 추임새도 넣어주면서 함께 흥을 돋운다.

사실 무당은 예부터 국가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한 나라의 안녕을 기원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해왔던 것이 무당이었다. 강릉단오굿을 하는 무당 역시 오랜 세월에 걸쳐 영동지방의 안녕과 풍요로움을 기원하는 역할을 해왔다.

현재 강릉단오제는 3명의 중요무형문화재 보유자가 있는데 단오제의 핵심 3요소인 제례·굿·놀이 분야에 각 1명씩 있다. 그중 단오굿에서 보유자로 있는 빈순애(53) 선생을 강릉단오제 개막을 하루 앞둔 지난달 19일 강릉단오문화관에서 만나봤다.

빈순애 선생은 종이로 만든 꽃인 지화(紙花), 용선(뱃머리에 용의 모형을 장식한 배) 등 단오굿에 사용되는 여러 장식품들을 직접 수작업으로 만드느라 분주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야말로 큰잔치를 앞두고 손님맞이 준비가 한창이다.

◆어린 시절, 학교까지 빠지며 굿판 구경

빈 선생은 시어머니인 故 신석남으로부터 강릉단오굿을 배웠다. 단오굿은 신내림을 받아야만 입무(入巫)할 수 있는 강신무와는 달리 세습무인 것이 특징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물론 세습무라고 해서 신내림을 안 받는 건 아니다. 보통 세습무는 신내림을 받지 않고 굿을 하는 것이 특징인데, 다만 신이 신병(神病)이 있으면 신내림을 받는다고 한다. 빈 선생은 신내림을 받지 않았다.

특이한 점은 빈 선생의 친어머니도 무당이었다. 빈 선생은 “어머니는 원래 강신무로 가야되는데 신을 안 받고 눌러놨기 때문에 그 신이 내게로 왔다. 그래서 나도 강신무로 가야했지만 시어머니에게 굿을 배웠기에 세습무를 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럼 그가 시어머니인 신석남 선생과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된 걸까. 그는 15살부터 신이 왔다고 한다. 동해안 어촌마을에서 자란 그는 집 근처에 서낭당이 있어 그곳에서 놀길 좋아했다. 또래 아이들이 서낭당을 다소 무서워하는 것과 달리 그는 유난히 학교 가는 시간을 제외하면 그곳에서 주로 시간을 보냈다.

특히 당시 빈 선생은 무당 흉내를 내면서 놀기를 좋아했다. 강아지 목에 달려 있는 방울을 빼앗아 사철나무에 달고 흔들면서 춤을 추었는가 하면, 또 아기 포대기 띠를 쾌자(快子)처럼 만들어 돗자리에서 역시 춤추며 놀았다.

동네에서 굿을 하면 학교를 안가고 볼 정도로 좋아했다. 그럴 때마다 그의 아버지는 때리고 혼내고 해서 절대 학교를 빠지지 않게 하려고 했으나, 말릴 수 없었다. 동네에 굿 날짜가 잡히면 그의 부모는 동네사람들에게 ‘절대 딸에게는 굿이 열린다는 것을 비밀로 해 달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때문에 그는 굿이 열리는 날, 그 사실도 모른 채 학교를 가다가도 무언가에 이끌려서 가던 길을 되돌아 와서 굿을 구경했다.

◆스승 신석남과 인연

▲ 단오굿 보유자로 있는 빈순애 무당을 강릉단오제 개막을 하루 앞둔 지난달 19일 강릉단오문화관에서 만나봤다. ⓒ천지일보(뉴스천지)
스승이자 시어머니인 신석남 선생과 인연을 맺게 된 것도 그의 동네에 찾아와서 굿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부터다. 신 선생은 그의 동네에 3년에 한 번 정도 단골무당으로 풍어제를 하기 위해 왔다. 일찍부터 빈 선생은 신기가 있었던 데다 동네 어른들의 말도 있고 해서 무당의 길이 천성이라 생각하고 그 길을 하려 했으나, 부모의 반대가 심했다. 무당이었던 어머니조차도 그 길이 힘든 점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더욱 반대했다.

그러던 차에 신 선생이 풍어제를 하러 왔다가 이 같은 얘기를 듣게 됐다. 평소 굿하러 올 때마다 굿판에서 춤추는 어린 빈 선생을 유심히 눈여겨봤던 터라 신 선생은 그에게 자신에게 와서 굿을 배울 것을 권유했다. 신기가 있는 데다 예능의 끼도 가지고 있었기에 제자로 삼고 싶었던 것이다. 오랫동안 집안 대대로 세습무를 이어온 신 선생에겐 며느리가 필요했던 것도 하나의 이유였다.

이에 당시 17세였던 그는 어머니 몰래 집에서 나와 신 선생의 집으로 따라왔다. 그의 어머니와 신 선생은 또 친구사이기도 했다. 신 선생은 친구의 딸이기도 한 그를 먼저는 수양딸로 삼아 굿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사설책부터 여러 종류의 다양한 굿까지 데리고 다니며 보고 배우고 익히도록 했다.

◆역시 쉽지 않은 무당의 길
천성이라 여기고 시작한 무당의 길이었으나 그는 당시 굿을 배우는 게 쉽지 않았음을 토로했다. “굿이 얼핏 보기에 쉬워보여도 굉장히 어렵다. 목청을 틔우려면 5~6년 정도는 해야 하고, 무용도 배워야 하는 등 힘들었다”고 그는 고충을 설명했다. 흔히 무당은 춤도 춰야하고 사설도 해야 하는 데다 소품도 직접 제작한다. 여기에 재능과 악사 등의 여러 가지 역할을 혼자 다한다. 그래서 굿을 종합예술이라 하며, 무당을 만능엔터테이너라고도 부른다.

신 선생의 집에 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스승의 아들을 남편으로 맞이하게 됐고, 시어머니로 모시게 된다. 정식 결혼식은 올리지 않았지만, 동거하며 살게 된다. 이어 19살에 아이를 낳았지만, 임신한 상태에서 어른들 따라 굿판을 다니다보니 심신이 지쳐 출산 중에 아기가 죽기도 하는 등 힘든 시간을 보낸다.

그러는 사이에 친정에서 무당의 집에 시집갔다는 사실을 알고는 야단이 벌어지는 등의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다. “어머니는 팔자 때문에 무당이 됐으나 딸만큼은 그렇게 키울 수 없다며 결사적으로 반대했다. 그러나 자녀도 있고 시어머니에게서 내가 열심히 배우고 하니 ‘팔자는 어쩔 수 없나 보다’하며 결국은 승낙했다”고 말했다.

◆유혹에도 철저히 세습무 굿 전승 노력

그는 신이 내렸기 때문에 강신무를 할 수도 있는 입장이었다. 강신무가 되면 돈벌이가 괜찮았지만 그는 철저히 시어머니의 세습무 굿을 전승하고자 노력했다. 또 강신무는 장단이 굿거리장단으로 간단하다.

하지만 세습무는 매우 복잡한 타악 장단으로 구성돼 있어 배우기가 쉽지 않다. 힘들어도 빈 선생은 꿋꿋하게 이겨내며 배우고 익혀 시어머니의 대를 이어 강릉단오굿의 중요무형문화재 보유자이자 만신으로 활동하고 있다.

◆올곧은 자세로 세습무 전승위해 애써

현재 그의 큰 딸(35, 전수자)과 작은 딸(33, 이수자)도 그를 따라 세습무의 길을 걷고 있다. 그에겐 세습무를 널리 전승하는 데 있어 든든한 제자들이지만 그 역시 자신의 어머니처럼 처음에는 강하게 반대했다. “나 역시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직접 겪어보니 무당이 힘든 길이라는 걸 알아 반대했다. 하지만 자식을 이기는 부모는 없더라”며 웃었다.

강릉단오굿은 종류만도 20개가 넘는다. 단오제에서 빈 선생은 보통 12개 정도를 담당한다. 특히 심청굿, 성주굿 등의 중요하면서도 긴 굿은 전담이다.

그는 “관객들을 만족시켜야 제대로 된 굿”이라며 이에 “다양한 세대의 관객층을 만족시키고자 그에 맞는 레퍼토리를 만들기 위해 늘 고민한다”고 말한다. 오랜 경력이 쌓인 무녀임에도 불구 그의 끊임없는 노력과 열정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아울러 그는 “굿을 하기 전에는 마음을 비우고 한마음으로 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등 늘 정결한 마음으로 준비를 한다”며 무당으로서 마음자세를 설명했다. 또 “제자를 뽑을 때도 예의를 잘 갖춘 자를 선별하며, 늘 정신자세가 흐트러지지 않게 엄격하게 훈련시킨다”며 수장으로서 그의 바른 정신도 엿볼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그는 “아직까지 굿에 대한 편견이 다소 있는데, 직접 단오굿을 보면 춤이나 소리 등이 뛰어나, 예술적인 측면이 많다는 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며 많은 관심을 당부했다.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