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순휘 한국국방문화혁신포럼 대표
지난 6월 19일자 일간지에는 깜짝 놀랄 만한 기사가 보도되었다. 10년 전 제2연평해전의 진실의 일부가 적나라하게 발표되었던 것인데, 제2연평해전은 대한민국이 한일월드컵 분위기에 열광하던 때인 2002년 6월 29일 발생하였던 남북한 해군 간의 무력총격전이었다. 이 전투가 북한해군의 ‘계획적 도발’이라는 것을 군 수뇌부가 사전에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전투현장의 장병들에게 당연히 대비강화지시가 있어야 했던 것이다.

이번에 보도된 진실을 재편성해보자면 우선 군의 대북감청부대(5679부대)가 사건발생 2주일여 전인 6월 13일과 교전 2일 전에도 “발포명령만 내리면 발포하겠다”는 북 경비정과 해군부대 간 교신을 감청분석해 군 상부에 보고했다. 정치권의 눈치를 보던 군 수뇌부가 북경비정이 노골적으로 남하하는데도 월드컵을 위해 긴장관리 잘하라는 식의 안일한 대응을 지시했다는 직무유기와 도발징후정보를 묵살한 행위는 결과적으로 고귀한 장병 6명이 희생을 자초한 것으로 재정리할 수 있다.

이 해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제1연평해전의 연장선상에서 분석해야 한다. 제1연평해전은 1999년 6월 7일부터 6월 15일까지 북한 경비정이 고의적으로 NLL을 최대 10 km 계속 침범하는 정전협정위반이 단초가 되었다. 우리해군은 북한 경비정의 선체를 참수리급 고속정이 부딪혀 막는 일명 ‘차단 기동’으로 대응하여 NLL 수호의지를 분명히 전달하였다. 그러던 중 15일, 북한 경비정 ‘등산곶 684호’가 선제공격하여 제1연평해전 발발했던 것이다.

‘등산곶 684호’는 우리 해군함정 ‘참수리 325호’의 반격으로 반파된 채로 도주하였고, 참수리급 고속정 325호의 정장 안지영 소령(당시 대위)이 부상하였으나 작전지휘를 성공적으로 마침으로써 ‘제1연평해전의 영웅’으로 기록됐다. 북한해군의 피해현황을 보면 최소 30명 사망, 70명이상 부상당했으며, 침몰 1척, 반파 1척 등 참패를 당한 것으로 외신이 보도했다.

이듬해 2000년 6월 15일 남북정상회담이 열리고, 6․15공동선언이 발표되면서 국민의 정부시절에 남북해빙무드가 확산되는 사회분위기였다. 금강산관광 등 북한의 대남유화제스처에 우리사회는 마치 남북평화가 온줄 착각할 정도였다. 이 시간에 북한해군은 보복전투를 준비 중이었던 것을 2002년 6월 29일 제2연평해전을 당하면서 알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 2002년 한일월드컵 3‧4위전으로 한국과 터어키가 경기 중이었다.

북한해군은 고의적으로 27일, 28일, 29일 연일 NLL을 침범하여 해군의 접근을 유인하였고, 경고방송과 시위기동을 하면서 퇴각을 시키려던 해군함정에 85mm기관포로 기습사격을 가해, 참수리급 고속정 357호 정장 윤영하 대위를 포함한 6명이 전사한 보복도발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이 당시에도 석연치 않은 문제가 있었던 것은 국지도발에 대한 평시 작전통제권을 가지고 있는 합동참모본부가 즉각적인 대응전투를 지연하였고, 회피하여 결과적으로 해군의 패전이 되었던 점이다. 그런데 이 사건의 내막에 군수뇌부의 결정적인 대북정보묵살과 직무유기가 있었다는 것은 과거지사(過去之事)로 구렁이 담 넘어 가듯이 넘어갈 것은 아니라는 시각이 있다.

해상교전 직후열린 6월 29일 13시 30분 1차 NSC(국가안보회의)와 2차 15시 대통령주재회의에서 ‘단순도발’이 아닌 ‘계획도발’로 보고했다고 한다면, 그 근거로서 감청부대의 정보보고를 가지고 판단했을 것이다. 이제 와서 서로 달리 증언하는 책임자들의 변명도 한심하려니와 김동신 전 국방장관의 말대로 ‘계획적 도발’이라는 판단을 사전에 인지했음에도 불구하고 6명의 장병이 희생당한 후에 탁상공론을 하고 있었다는데 문제가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전투준비태세완비를 생활화하라는 것은 상부의 구두선(口頭禪)이란 말인가?

군 정보계통의 업무란 아무리 작은 첩보라도 융합처리분석되어 정보로 생산이 되면 그것을 근거로 작전대응하는 것이 기본이다. 하물며 중간과정에서 그 중요한 첩보정보를 특정인의 눈치를 보며,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측면은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유감스럽다. 따라서 정보처리를 작위적으로 변경한 관계자는 전현직‧지위고하를 불문하고 반드시 재조사할 필요가 있다. 더욱이 국민적 관심사로서 진실을 알고자하는데 이런저런 이유로 함구하는 것은 재발방지에 도움이 안 될 것이다. 당시 지휘라인의 사람들이 책임을 지기보다 승승장구하여 장관도 했고, 참모총장도 했다면 아이러니한 일 아닌가? 무능한 자가 부하의 피를 대가로 영예와 영달을 누린다면 과연 누가 국가안위의 순간에 최선을 다하겠는가? 이러한 풍토가 군뿐 만 아니라 공직사회의 커다란 병폐로 자리하고 있다면 국가안보의 기강은 사상누각(砂上樓閣)이 아니라고 볼 수 없다.

6.25 전쟁시 북진해 압록강에 이르렀던 10월초 어느 날 중공군을 체포하여 정보를 분석한 백선엽장군은 우려하던 중공군의 참전사실을 미8군사령부에 보고하였다. 그러나 이를 묵살한 미8군사령부는 안일한 진격만을 계속하다가 결국은 10월 25일 이후로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밀려서 엄청난 패배를 당하고 후퇴하게 된다. 이처럼 군사정보는 전장의 승패를 좌우하는 매우 중요한 것으로서, 때로는 국가의 흥망도 좌우하는 것이니 10년 전 제2연평해전 직전의 정보 묵살행위의 재발이 다시는 안보현장에 없기를 기대한다. 설마 첩보가 사실과 다른 결과가 나오더라도 일단은 철저한 대비태세를 갖추고 준비하는 자세가 올바른 군의 안보태세인 것이다. 결과적으로 제2연평해전은 자초한 전화(戰禍)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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