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사단 장병들이 남과 북을 잇는 통문을 사수하고 있다. (1사단 제공)

[1950년 6월 25일 오전 4시경. 38선 여러 지역에서 북한의 공세로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대한민국 최대의 위기였지만 수많은 영웅의 희생으로 우리는 자유민주주의의 기치를 지킬 수 있었다. 이를 발판으로 한국은 불과 60여 년 만에 20-50클럽(국민소득 2만 달러, 인구 5천만 명)에 진입하며 성공 시대를 열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또다시 위기를 맞고 있다. 종북주의, 안보불감증으로 나라가 뿌리째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이 시점에 우리에게 필요한 건 ‘애국혼’이다. 조국을 지키기 위해 쓰러져갔던 이들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에 천지일보는 6.25 당시 가장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구국(救國)의 사단 ‘1사단-전진부대’를 찾아 군의 의미를 되짚어봤다.]

남한-북한의 유일한 소통로 ‘통문’ 사수해
6.25 전쟁서 112회 ‘전승’… 평양 최선봉 입성

[천지일보=송범석 기자] “보세요! 통문이 열립니다!”

남과 북이 유일하게 소통하는 지점, 통문을 통해 수십 대의 차량이 남쪽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모두 개성공단에서 나오는 차량이었다. 진초록의 풍경을 배경으로 ‘금기의 땅’을 밟고 유유히 돌아오는 차량들을 보고 있자니 묘한 전율마저 감돌았다.

삽시간 만에 차량 행렬이 끝나고, 다시 이중 문이 닫혔다. 시계를 보니 오후 4시를 조금 넘었다. 마지막 통행일 듯싶었다. 잠깐 머무는 동안 차량 행렬을 본 것이니 꽤 운이 좋았던 셈이다.

남측 통문을 넘으면 바로 비무장지대(DMZ)다. 반백 년의 시간이 쌓여 있는 아름다운 풍광이 눈앞에 펼쳐졌다. 자연은 근면했다. 숱한 피를 뿌렸던 이 땅은 어느새 세계가 주목하는 자연의 보고(寶庫)가 돼 있었다.

이곳 통문은 걸어서 북으로 갈 수 있는 단 하나의 통로다. 혹자는 이러한 의미를 부여하며 통문을 남북의 ‘평화’가 시작되는 곳이라고 명명한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다. 매일 700여 대의 차량이 오가는 이 길을 수십 문의 포가 겨누고 있다. 길이 잘 닦여 있는 만큼 언제든 북한군이 치고 내려올 수 있어서다. 실제로, 이 부근의 긴장감은 말로 다 설명하지 못할 정도다.

통문장인 김기준 하사는 “적이 바로 앞에 있기 때문에 항상 긴장을 하고 단 한 명의 침투도 용납하지 않고자 철저하게 경계를 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곳은 최전방 부대인 1사단(전진부대) 섹터다. ‘안보’와 ‘통일’, 이 상반된 가치를 동시에 지켜내는 게 1사단의 임무다.

지난 천안함 사태와 연평도 포격 도발 사건이 일어났을 때도 통문은 폐쇄되지 않았다. 통문을 그저 ‘기업인들이 사업차 거치는 문’ 정도로 여겼다면 진작 문을 막았을 것이다. 그러나 통문이 함의하는 상징성은 그렇게 가볍지 않다.

“이곳은 ‘통일’의 문입니다. 그렇기에 북한의 숱한 도발 속에서도 울분을 참으면서 끝내 열어두고 있습니다. 이처럼 1사단은 ‘안보’와 ‘통일’ 두 가지 중 어느 한 가지도 소홀히 할 수 없는 사명을 안고 있습니다.”

사단 정훈참모 김이호 중령의 말대로였다. 통문으로 나 있는 길은 한 번 끊기면 다시 연결할 수 없을뿐더러 통일은 저만치 멀어진다. 그러니 통문을 지키는 것은 ‘통일’을 지키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1사단이 이처럼 중요한 임무를 맡은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1사단은 대한민국의 ‘나이테’를 고스란히 담고 있기 때문이다. 사단은 ‘1’이라는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육군 최초로 1947년 창설돼, 전군 최초로 38선 경비임무를 수행했다. 대한민국 건국일이 1948년이니, 사단은 시작부터 대한민국과 함께한 것이다.

1사단이 빛나는 것이 단지 ‘최초’ 때문만은 아니다. 사단은 6.25 전쟁 기간 중 다부동지구 전투에서 북한군 3개 사단을 격멸하고 대구를 지켜냈다. 낙동강방어선 가운데 대구 북방 22km에 위치한 다부동이 무너지면 사실상 모든 게 끝나는 상황이었다. 이를 잘 알고 있던 북한군은 증강된 3개 사단을 투입, 약 2만 1500명의 병력과 T-34전차 20여 대 및 각종 화기 약 670문으로 필사적인 공격을 가했다. 당시 1사단은 북한군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병력이었지만 온몸을 던져 진격을 막아내며,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한 조국을 구해냈다. 영화 ‘포화 속으로’를 통해 잘 알려진 학도병 500여 명도 당시 1사단과 운명을 같이했다.

이후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반격작전에 가담한 사단은 평양을 최선봉으로 입성함으로써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부대칭호를 하사받았다. 그게 ‘전진부대’였다. “계속 북으로 전진해 통일염원을 달성하라”는 뜻이었다. 당시 사단은 적 2개 사단을 격파한 성과로 전 장병이 1계급 특진하는 대기록을 달성했다. 결과적으로 사단은 ‘무적’이었다. 총 112회의 전투에서 112회 전승을 달성했다. 단 한 번도 패하지 않았다는 얘기다.

아울러 현재에 이르러서는 판문점과 JSA, 개성공단 진출입 도로와 철도를 사수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과거와 현재를 잇는 역사의 씨줄과 날줄이 1사단을 향하고 있는 셈이다. 이 같은 무게감 때문일까.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조국의 지문’은 여전히 1사단 장병들의 마음에 오롯이 남아 있었다.

김 중령은 “1사단 장병들은 다부동지구 전투 때처럼 언제 꺼질지 모르는 조국의 촛불을 지키는 그 심정으로, 대한민국 탄생의 역사를 지켰고, 조국을 위기에서 지켰고, 현재는 통일의 염원을 지키고 있다”면서 “이것이 1사단이 가진 긍지”라고 강조했다.

짧은 취재 일정이었지만 조국의 최북단에선 길고 긴 풍상의 세월에도 꺼지지 않는 ‘푸른 불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대한민국 군은 강했다. 침묵하는 국민을 뒤로하고, 그들은 ‘우리가 무너지면 조국이 무너진다’는 절박한 심정을 가지고 스스로를 채찍질하고 있었다.

지금, 우리는 다시 6.25를 맞는 길목에 서 있다. “안보와 군은, 당신에게 어떤 의미인가”라는 물음에, 이제 우리가 답할 차례다.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