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옥랑 꼭두박물관 관장

요즘은 어떤 희곡상들이 있나 하고 찾아보니, 몇몇 이름이 눈에 들어온다. 다른 분야에 비해 여전히 한정적인 수치이나 90년대에 비하면 확실히 늘어나긴 했다.

옥랑희곡상을 제정하던 1999년 무렵, 나의 기억으로 국내의 희곡상은 옥랑문화재단과 국립극장 2곳에서만 운영되고 있었다. 사정이 그렇다 보니, 공모 때마다 100편이 조금 안 되는 많은 작품들이 밀려들었다. 옥랑희곡상은 한국의 신화, 설화, 사화 부문과 자유소재 부문으로 구분하여 진행한 것이 특징인데 각각 800만 원과 500만 원을 상금으로 내걸고 문예지에 발표되지 않은 순수창작희곡을 공모하였다. 활동 중인 중진 연출가들로 구성된 심사위원단이 예심을 맡고, 저명한 희곡작가 및 관련 전문가들로 또 다른 심사위원단을 구성하여 본심을 맡게 했다. 차범석, 도정일, 안치운, 이강백 등이 그때 심사위원으로 참여했던 이름들이다.

옥랑희곡상은 그 제정배경이 옥랑문화재단의 취지와 연관이 깊다. 옥랑문화재단은 설립 초기부터 한국 창작공연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한국극작워크숍을 다양한 형태로 지원해왔다. 전통에 기반하는 창작극을 복원, 개발하겠다는 의지는 1998년 프로젝트 살풀이21을 통해 구체화된다. 프로젝트 살풀이21은 한국적 이야기의 원형을 찾아 이를 바탕으로 한 창작희곡을 생산하고 전통적 연기양식을 개발하여 전수하는 일에 목적을 두고 기획되었다. 서류심사와 인터뷰를 통해 선발된 작가들을 대상으로 공동 주제를 제시하고 관련 세미나와 워크숍을 개최하여 그들의 창작활동을 지원하는 방식이다. 이러한 작가 워크숍을 통해 최종 수상작품을 선정하고 차후에는 극을 무대에 올리는 과정으로 운영되었으며 이것이 나중에 옥랑희곡상이라는 형태로 발전한 것이다.

그렇게 1998년 9월 처음으로 ‘단군신화’를 주제로 삼고 선발된 작가들을 대상으로 세미나를 개최했다. 이어 11월에는 ‘수메르신화에서 단군신화까지’, 같은 달 말에는 ‘한사상과 단군신화’를 주제로 탐구하였으며, 뒤이어 단군신화 유적지인 천제단을 답사한 뒤 ‘신화와 연극’이라는 제목의 단군신화 희곡자료집을 발간하였다. 프랑스 극단 오딧세이를 국내에 초청하여 공연을 올리고 연기 워크숍을 열어 타국의 신화연구 방법론과 공연화 과정까지 배웠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홍원기의 ‘쎄울단군’, 김성수의 ‘어미의 노래’, 김수미의 ‘문’, 안현정의 ‘어둠아기 빛아기’ 4편이 1회 수상작이 되어 세상에 나왔다. 역시 동일한 워크숍 방식을 통해 장진영의 ‘바리데기’가 2회 수상작으로 최종 선정되었으며 3회부터는 워크숍이 아닌 공모제로 전환되어 2009년까지 총 10회의 옥랑희곡상이 개최되어 온 것이다.

나는 공연기획과 제작을 하면서 느꼈던 소재 빈곤, 작품 물량의 한계를 옥랑희곡상을 통해 극복하고자 했다. 그러나 진행할수록 작품은 신화보다도 자유소재 부문으로 크게 몰려 한국적 희곡을 발굴하고자 했던 애초의 기획의도를 무색하게 했으며, 접수된 작품들의 수준편차가 컸다는 사실도 결과적으로는 문제점으로 작용하였다. 어떤 작품은 무대에 올리기에 너무나 빈약했고 또 어떤 것은 너무 거창해서 공연 가능성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여전히 무대에 올릴 만한 작품들이 부족했던 것이다. 10년을 계속했지만 희곡상을 정리하기로 결심하게 되는 시점이 왔고, 그 흔적은 8권의 수상작품집으로 남았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옥랑희곡상을 거쳐간 많은 작가들이 지금도 활동하고 있으며, 나 역시 한 작품씩이나마 그때의 수상작을 무대에 올리는 일을 계속하고 있다. 그리고 옥랑희곡상 10년 경험을 바탕으로 다시 다른 이름의 문화예술 지원제도가 탄생할 예정이다. 그런 의미에서 옥랑희곡상은 끝이 아닌 하나의 과정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다시 우리만의 이야기, 우리만의 연극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기를 나는 지금도 고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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