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순휘 한국국방문화혁신포럼 대표
6월 18일은 보통의 사람에게는 별다른 의미가 없는 그저 그런 초여름의 하루이다. 달력을 보아도 기념일이나 절기 표시가 없으니, 개인적으로 이날과 특별히 관련이 있지 않은 한 6월 18일이 무슨 날인지 모른다고 해서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6월 18일은 우리 현대사에서 그 의미가 결코 가볍지 않은, 아직 덜 아문 상처와도 같은 날이다. 6.25전쟁이 막바지이던 1953년 6월 18일, 이승만 당시 대통령이 남한 내 7개 수용소에 있던 3만 7000여 명의 포로 중 북으로 가기를 거부하는 포로(반공포로) 2만 7389명을 전격적으로 석방했던 것이다.

전쟁 중에 대량으로 생포되는 북한인민군과 중공군 포로를 수용하기 위하여 1950년 11월 27일 유엔군에 의해 거제시 옛 신현읍, 연초면, 남부군 일대의 1200헥타르 규모의 수용소가 설치되었고, 1951년 2월부터 포로수용소 업무가 시작되었다. 포로수용소는 60, 70, 80, 90 단위의 숫자가 붙은 구역으로 나뉘었고, 1개의 단위구역(enclose)에는 6000명을 수용하였다. 각 구역의 하부 구조로 수용동(compound)이 있었고, 전체 수용소는 4개의 구역과 28개의 수용동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중앙 계곡에는 제6구역, 동부 계곡에는 제 7, 8, 9 구역이 설치되었다. 또한 이러한 시설과 규모를 자체 지원할 수 있는 비행장, 항구, 보급창, 발전선박, 병원, 도로, 탐조등을 설치하여 운영하였다.

1951년 6월까지 북한 인민군 포로 15만과 중공군 포로 2만 명 등 최대 17만 3천 명의 포로를 수용하였고, 그 중에는 여성 포로도 300명이 있었다. 그러나 강제징집 등의 이유로 송환을 거부하는 반공 포로와 송환을 원하는 친공포로 간에 유혈사태가 자주 발생하였고, 1952년 5월 7일에는 당시 수용소 소장이었던 도드 준장이 포로들에게 납치되었다가 석방되는 등 냉전시대 이념갈등의 축소판과 같은 전쟁양상이 발생했던 또 하나의 전쟁터였다.

북한군은 15만여 명의 포로를 관리하기 위해 이학구 대좌를 의도적으로 포로가 되도록 하여서 거제도 포로수용소를 지휘감독한 치밀한 북한군 포로의 전향방지관리와 후방투쟁정책을 구사한 또 하나의 6․25전쟁이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대다수가 친공포로였던 당시의 포로수용소의 분위기에서 자유를 선택하고 석방의 그 날을 바라던 2만여 명의 반공포로에게는 생명을 지키기 위한 투쟁을 할 수밖에 없었던 위험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제네바협정에 의한 포로교환은 자동포로송환방식으로서 반공을 선택한 포로들은 신의 가호가 없다면 다시 죽음의 땅 북한으로 송환될 수밖에 없는 절체절명의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이때 바로 이 대통령의 반공포로석방이라는 위대한 결단이 있어서 그들은 새로운 자유의 삶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미 휴전협정을 하고 있었던 1953년 6월은 이미 미국이 유엔군의 중심이 되어서 한국전쟁의 휴전을 위하여 모든 것을 결정하던 시기였기에 포로관리부터 송환의 결정 등 전장의 모든 권한을 가지고 있는 미국의 결정을 한국은 단지 따를 수밖에 없었던 약소국의 처지였다.

이러한 처지의 대한민국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이 대통령은 다른 것은 다 미국을 따르지만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반공포로에 대하여는 심각한 고뇌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북한공산당의 만행을 알기에 자유를 선택한 반공포로들의 소망을 자유대한민국이 외면한다면 그들의 남은 선택은 무조건 학살당하는 죽음뿐이라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에 이 대통령이 미국과도 상의하지 않고 반공포로는 석방한다는 위대한 결단을 스스로 집행한 날이 바로 1953년 6월 18일인 것이다.

이러한 이 대통령의 거사는 6.25전쟁 휴전을 앞두고 53년 한국과 미국이 벌인 갈등의 분기점으로 등장했고, 이 과정에서 이 대통령을 제거한다는 내용의 ‘에버레디 오퍼레이션(Ever ready operation)’이 계획되었을 정도로 이 대통령의 정치적 생명을 건 위험한 결정이었다. 이 대통령이 이러한 위험을 몰랐을 리 없기에 그가 참으로 위대하다고 할 것이다.

이러한 이 대통령 제거계획이 아이젠하워 미 대통령에 의하여 직접 지시되었다는 것은 연세대 국가관리연구원 통치사료센터(소장 박명림 교수)가 53년 6월 18일 긴급 소집된 미국 제150차 NSC(국가안전보장회의)회의록에서 찾아내었다.

그러나 전 세계의 여론은 이 대통령의 결단에 지지와 찬사를 주었고, 그를 진정한 자유와 반공의 지도자로서 존경을 표하자 미국도 이승만 제거계획을 포기하였고, 오히려 이 대통령이 주장하던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는 결정을 하였던 것이다.

이제 반공과 자유를 선택한 반공포로의 사흘이 지난다. 그러나 역사는 영원히 이승만과 반공포로석방을 기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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