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쇄물의 발달사에 있어 목판과 활자의 발명은 기술적인 혁명을 가져왔다고 평가받고 있다. 일일이 손으로 직접 써야 했던 원시 기록형태에서 활자와 그에 적합한 잉크를 사용해 원하는 그림과 글자를 대량으로 찍어낼 수 있는 인쇄 방법이 고안되는 등 인류기술사에서 활자술(活字術)은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으로 알려진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직지)’은 우리나라의 자랑스러운 기록유산이다. 그렇다면 직지는 누구에 의해 어떻게 만들어졌으며, 어디에서 인쇄됐을까. 또 서양에서 최고(最古) 금속활자본으로 유명한 구텐베르크 성서는 어떻게 제작됐는지를 함께 알아보고, 인류 문명의 가장 위대한 기술로 꼽히는 활자 인쇄술을 조명해본다.


‘흥덕사’ 새긴 명문, 택지공사로 훼손된 절터 동쪽서 발견
청동금구·사발 등 출토 유물에 새긴 글귀 직지 下권 기록과 일치

[천지일보=박선혜 기자]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으로 알려진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직지)’은 어디에서 인쇄됐을까. 직지 하(下)권의 마지막 장 기록에는 “청주 흥덕사에서 선광 7년 1377년(고려 우왕 3년)에 금속활자로 인쇄했다”고 밝히고 있다.

▲ 복원된 청주 흥덕사 전경. (사진=천지일보DB)

공사 중 우연히 발견된 사지(死地)… 정체는?

한국토지공사는 1983년 12월부터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운천동 ‘운천지구택지개발사업’을 시작하게 된다. 그러자 충청북도는 개발 사업이 시작되기 전에 불교 유물의 출토지로 알려져 있던 운천동 절터 발굴을 할 필요성을 느끼고, 그해 11월부터 청주대 박물관에 의뢰해 ‘운천동 사지발굴조사’를 진행했다.

당시 발굴조사단의 조사원으로서 현장의 실무를 맡았던 박상일 연구원은 청주시 사직동에 거주하는 김정구 씨에게서 연당리 가강골 마을에 절터가 있다는 제보를 받게 됐다.

이후 현지를 답사한 결과 운청동 절터 서남쪽으로 그리 멀지 않은 연당리 가강골 마을 515-1번지 민묘 주변에서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옛 절터가 발견됐다. 절터에서는 화강암으로 잘 다듬은 원형과 방형의 초석 3기와 고려시대로 추정되는 치미편 및 연화문 와편이 발굴됐다.

박 연구원은 여러 차례의 현지조사와 평판측량을 실시한 후 간단한 조사보고서를 작성해 충청북도에 제출했다. 또 ‘운천지구택지개발사업’ 구역에 포함된 이 지역의 보존 조치 및 유물 발굴조사의 필요성도 제기했다.

사지 동쪽에서 발견된 ‘흥덕사’ 음각 청동금구

▲ 청동불발에 새겨진 흥덕사(興德寺) 글귀가 선명하다. (사진=천지일보DB)
이른바 ‘연당리 사지’로 불린 곳에 대한 발굴조사는 쉽지 않았다. 1985년 1월, 충청북도는 이 절터의 발굴조사를 위해 한국토지공자 충북지사에 일대 공사 중지를 요청했다.

하지만 공사는 계속됐고, 절터의 중심에 해당하는 금당지(金堂地)의 유구(옛날 토목건축 구조와 양식을 알 수 있는 실마리가 되는 자취)가 있는 곳까지 흙을 반출하며 택지를 조성했다. 그 결과 유구 파손은 물론 많은 유물이 유실됐다.

충청북도 문화재위원회는 더 이상의 피해를 막기 위해 발 벗고 나섰다. 1985년 3월에 이 절터에 대한 긴급발굴을 결의했고, 그해 6월 청주대 박물관이 이 지역의 이름을 따서 ‘연당리 사지’라 명칭하고 발굴조사계획서를 제출, 문화재관리국으로부터 발굴허가를 받아 7월부터 10월까지 4개월간 비교적 온전한 상태의 서반부 지역을 대상으로 발굴조사를 펼쳤다.

발굴 시작 10여일 후 서회랑지의 기단부에서 ‘계향지사(桂香之寺)’라는 네 글자가 선명하게 새겨진 기와가 출토됐다. 발굴단은 출토된 기와 명문을 통해 계향사 절터로 추정했지만, 1979년 우암산 관음사에서도 똑같은 기와편이 출토돼 이곳을 ‘계향사’로 볼 수는 없었다.

그러던 중 1985년 10월 8일 발굴조사를 마치고 주변 정리를 하다가 택지공사로 훼손된 사지 동쪽에서 ‘흥덕사’라고 선명하게 음각된 청동금구 파편이 기적적으로 발견된다.

파편 측면에는 ‘甲寅五月日 西原府 興德寺 禁口壹坐(갑인5월일 서원부 흥덕사 금구일좌)’라고 기록돼 있었다. 이로써 이 절터가 ‘직지’를 인쇄한 ‘흥덕사’라는 것이 확인됐다.

발견 후 일각에서는 금구 조각 하나로 ‘흥덕사’라 단정 지을 수 없다고 반박했다. 이후 조사단은 정밀조사를 실시, 청동보당용두 2점을 비롯해 승려들이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사발(청동불발) 등 여러 점의 청동유물을 찾아냈다. 이 청동유물에도 이곳이 흥덕사임을 입증해주는 40자 명문(皇統十年 興德寺, 황통십년 흥덕사)이 새겨진 것을 확인했다.

또 청동금구의 몸통 부분이 발견, 24자로 구성된 명문이 판독됐다. 명문은 “갑인 5월에 서원부 흥덕사에서 금구 1좌를 다시 주조했는데 32근이 들어갔다”는 내용이다. 이로써 이곳의 사찰명은 ‘흥덕사’이며 ‘직지’ 마지막 장에 기록된 곳임이 입증됐다.

용어설명
금구(禁口)-불교 사찰에서 대중을 불러 모으거나 급한 일을 알리는데 사용하는 금속으로 만들어진 타악기다. 측면에는 주로 제작연대, 소속사원의 이름, 관계자의 이름, 발원문 등의 기록이 새겨져 있다.

참고 <청주고인쇄박물관-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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