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8일 휴일을 맞아 많은 관람객이 남한산성행궁을 찾아 안으로 들어가고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100여년 만에 제 모습 갖춰… 유사시 제2의 한양 역할 가능해

[천지일보=이현정 기자] 서울 송파구에 자리한 ‘대청황제공덕비’는 장수의 상징인 거북을 밟고 큰 규모의 몸집을 자랑하고 서 있지만 비문의 내용은 모두 훼손된 상태다. 누가 언제 어떻게 비문을 지웠는지 가늠할 수 없지만 비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게 되면 십분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

비석은 인조 17년인 1639년 조선이 병자호란으로 청에 패하고 왕이 무릎 꿇었던 치욕적인 역사를 고스란히 담은 ‘서울 삼전도비’이다. 청태종이 요구해 만들어진 것으로 인조가 남한산성을 빠져나오는 순간부터 예정된 비석인 셈이다.

치욕의 역사는 정체되지 않았다. 조선 백성은 병자호란 이후로 남한산성을 보면서 청나라에 대한 복수를 다짐하는 상징적인 장소로 삼았다.

조정에서도 굴욕적인 사건을 겪었지만 다시는 똑같은 일을 반복하지 않도록 더욱 남한산성을 정비했다. 조선 후기에 들어서 숙종․영조․정조․철종․고종은 남한산성에 행차해 병자호란 때 사망한 사람들의 충절을 기리고 군사적 거점의 기능을 강화하는 데 주력했다.

백성과 나라가 함께 아픔을 딛고 탄탄한 미래를 만들어가기 위한 상징적 장소가 됐던 남한산성은 일제강점기 때 의병들의 집결지가 됐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 이후 유생 중심의 의병항쟁이 전개되면서 1930년대까지 남한산성은 항일민족운동의 중심지로 부상했다.

복수를 다짐하고 국권 성장의 상징이었던 남한산성에 의병이 모여들고 항일운동이 전개되자 이를 두려워했던 일제는 결국 산성 안에 있던 행궁을 파괴했다. 행궁은 임금이 궁 밖으로 행차할 때 임시로 머무르던 별궁이지만 남한산성의 행궁은 남달랐다.

남한산성행궁은 정무시설과 함께 타 행궁에는 없는 종묘사직 위패 봉안 건물을 갖추고 있어 유사시 한양 대신 제2의 수도 역할을 이행할 수 있는 곳이었다.

천혜요새로 한 번도 함락된 적 없는 남한산성과 그 안에 종묘사직을 갖춰 조선왕조의 위엄을 나타내고 있는 행궁이 조선 백성에 미치는 영향을 두려워 한 일제는 무참히 행궁 건물을 모두 폭파시키고 의병들을 탄압했다.

이러한 역사적 상흔과 아픔이 서린 남한산성행궁이 100여 년의 세월을 보낸 뒤 지난달 24일 비로소 제 모습을 찾아 일반에 공개됐다. 축소된 궁궐 양식을 보이는 남한산성행궁은 왕의 침실이 있었던 내행전과 업무를 보던 외행전, 후원, 종묘 등으로 성됐다.

▲ 내행전 마루에는 일월오봉도 병풍과 임금이 앉던 의자가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지난 2000년에 행궁 복원사업이 진행되고 2010년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잠정목록으로 등재됐다. 이후 2년 뒤인 현재 행궁 전체가 복원돼 그 가치와 의미를 국민과 세계에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복원된 행궁이 일반에 공개되자 전국 각지에서 많은 관람객이 몰려들었다. 초등학생 아들들과 함께 행궁을 찾은 정영숙(45, 여, 성남시 분당구 정자동) 씨는 “아이들과 답사숙제를 하려고 행궁에 왔는데 해설사와 동행하면서 남한산성의 역사와 행궁복원 등의 의미를 알게 돼 많은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이번 남한산성행궁은 건물 크기, 방향, 도형과 형태, 심지어 기와의 무게까지 고증에 근거해 복원돼 세계문화유산으로서도 손색없는 모습을 갖췄다.

전보삼(만해기념관장) 남한산성 세계문화유산추진위원회 위원은 “역사 속에는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이 함께한다. 끊어질 듯하면서도, 사라질 듯 하면서도 사라지지 않는 우리 민족의 저력을 이번 남한산성행궁 복원을 통해 확인하는 기회로 삼았으면 좋겠다”고 조언했다.

내행전 바로 위쪽에 있는 재덕당에는 ‘반석’이라는 한자가 새겨진 큰 바위가 있다. 이는 ‘튼튼한 반석 위에 종묘사직을 세우겠다’는 인조임금의 염원이 그대로 담긴 것이다. 탄탄한 반석 위에 새 옷을 입고 선 남한산성 행궁. 현재 행궁은 한민족의 저력과 무한 잠재력을 품고 2014년 유네스코 등재를 위해 힘찬 날갯짓을 준비하고 있다.

▲ 내행전 뒤쪽 재덕당에는 '반석'이라 새겨진 큰 바위가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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