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人權)이란 무엇인가. 인간이 인간답게 존재하기 위한 보편적인 권리와 지위, 자격을 아우르는 개념이다. 이는 곧 민족·종교·귀천·이념에 관계없이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모두가 평등하게 가지는 당연한 권리다. 그러나, 우리가 인식하지도 못하는 사이에 우리 이웃들과 사회적 약자들은 부단히 억압당하고, 유린당하고 있다. 이에 본지는 ‘고발’과 ‘대안’이라는 두 가지 키워드(keywords)로 인권 보장의 해법을 모색해봤다.

 

▲ 강제개종교육피해자연대 회원들이 피켓을 들고 시위하고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납치… 감금… 폭행…
개종 목사, 삶을 짓밟다

[천지일보=김일녀 기자] “탄원서를 쓸 때 가장 먼저 생각난 것이 우리나라 헌법에 명시된 ‘행복을 추구할 권리’였어요. 아무리 부모라고 해도 종교를 문제 삼아 자식의 인생을 이렇게 짓밟을 수는 없는 것 아닌가요. 제 삶을 한순간에 빼앗겨 버린 것 같아서 너무 속상해요”

김수민(가명, 22, 여) 씨는 지난해 10월 부모와 종교적인 갈등을 빚기 전까지만 해도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부모님은 1남 1녀 중 장녀인 김 씨가 대학생이 될 때까지 단 한 번도 매를 든 적이 없었다. 그런 부모님이 변했다. 딸로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정도의 욕설과 폭행을 해가며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긴 것이다. 부모님과 김 씨 사이에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목사가 성도 폭행·감금에 직접 가담
지난해 10월 1일, 귀가하던 김 씨는 집 앞에서 낯선 남자들에게 납치됐다. 남자들은 대기하고 있던 승합차에 김 씨를 밀어 넣었다. 당시 승합차의 문은 김 씨가 오기 전부터 열려 있었고 차량 반대편에서는 김 씨를 차 안으로 밀어 넣기 위해 두 남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아버지와 그가 예전에 다녔던 대구 A교회의 부목사였다. 운전석에도 이미 대학부 담당 목사가 앉아 있었고 지역 담당 전도사와 어머니도 차에 타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오늘 생일이니 같이 밥 먹자”며 빨리 오라고 전화했던 어머니, 액세서리 무역업 일로 중국에 있어야 할 아버지까지 모두 그 차량 안에 있었던 것이다.

순간 김 씨의 머릿속에 떠오른 단어가 있었다. 바로 ‘강제개종교육’이었다. 김 씨는 2010년 초부터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가 이단으로 규정한 교단의 교리를 배웠고 부모님과 함께 다니던 교회도 옮겼다. 김 씨는 교회를 옮긴 것에 대해 “기존에 다니던 교회는 사람을 무시하고 차별했는데 그 모습을 보고 사랑이 없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옮긴 교회에서는 상처를 감싸주고 품어줬어요. 그 모습에서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사랑을 느낄 수가 있었어요”라고 말했다.

특히 아버지는 김 씨가 옮긴 교회에 대해 좋지 않은 인식을 갖고 있던 터였다. 이런 맥락에서 김 씨는 부모님과 A교회 목사·전도사가 이 모든 일을 계획한 것으로 판단했다. 물론 배후에는 강제개종교육을 전담하는 목사의 지시가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강제로 김 씨를 태운 차량은 곧바로 어디론가 이동하기 시작했다. 목포를 거쳐 마지막에 도착한 곳은 강제개종교육을 시키는 곳으로 알려진 광주의 B교회였다. 이동하기 직전 김 씨는 핸드폰을 빼앗겨 누구와도 연락을 취할 수가 없었다. 또 김 씨가 화장실에 가고 싶다고 했을 때 부모님과 목사들은 요강을 준비했다며 차안에서 볼일을 보라고 했다. 이에 김 씨는 여자로서 수치심은 물론 큰 모욕감을 느꼈다며 당시 일을 떠올리기조차 힘들어 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부모님은 물론 동승한 목사도 “너는 정신이 이상하다. 이상한 사이비에 빠졌다”며 “이 교육(강제개종교육)을 받지 않으면 (정신이) 이상한 사람이 될 것”이라면서 개종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압박했다. 김 씨는 육체적으로 당한 폭행도 고통스러웠지만 말로 당한 고통이 더 크고 참을 수 없다며 울먹였다.

그는 “이제까지 20년 넘게 멀쩡하게 살아온 사람을 한순간에 정신질환자 취급하는 데 너무 화가 났고 억울했다”며 “그들은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믿지 않았고 들으려고조차 하지 않았다”고 토로했다. 밤새 부모님을 설득해 잠깐 집으로 올라올 기회를 얻은 김 씨는 부모님이 또 자신을 납치·감금을 하거나 강제개종교육을 받는 곳으로 끌고 갈까봐 불안한 마음에 집을 나오게 됐다. 그리고는 자신을 납치하는 데 가담했던 대구의 A교회 목사를 경찰에 고소했다.

그러나 목사는 부모님의 부탁으로 가담한 것이 인정돼 무혐의 처리를 받았다. 결국 김 씨가 당한 피해를 인정받기 위해서는 부모님까지 고소를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차마 그렇게 할 수 없었던 김 씨는 경찰서 민원실에 피해 호소문을 올리는 등 피해 사실을 알리는 데 주력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는 17시간 동안 납치·감금돼 겪었던 일들이 지울 수 없는 정신적 고통과 충격으로 남아 있다고 호소했다.

◆폭행·납치 재시도… “이 정도면 부모를 고소해라”
하지만 이것으로 끝난 게 아니다. 김 씨를 더 큰 충격에 빠지게 한 사건은 지난 3일 발생했다. 평소에는 밤늦은 시간엔 한 번도 심부름을 시키지 않던 어머니가 그날따라 속이 좋지 않다면서 그에게 소화제와 음료수를 사오라고 시켰다.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지만 김 씨는 어머니가 아프다는 말을 믿고 밖으로 나왔다. 마침 밖에는 이날 김 씨를 집까지 바래다준 친구가 콜택시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친구에 따르면 당시 김 씨가 나오자마자 승합차 한 대가 급하게 이동하는 모습이 목격됐다. 이후 김 씨가 소화제와 음료수를 사서 집으로 들어가자마자 공교롭게도 지난해 일차적으로 납치당했을 때 함께 있었던 김 씨의 친구 어머니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순간 김 씨는 지난해 강제개종교육에 끌려갈 당시와 흡사하게 벌어지는 상황이라고 판단, 집에서 빨리 벗어나기 위해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갑자기 중국에 있어야 할 아버지가 집안으로 들어왔다. 곧이어 딸에게 가할 수준이라고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폭행이 시작됐다. 아버지는 김 씨를 향해 의자를 던지고, 주먹으로 때리고 발길로 차는 등 무차별적인 폭행을 가했다. 겁에 질린 그가 소리를 지르자 어머니조차 그의 입을 틀어막고 머리채를 잡아당기면서 집밖으로 끌고 나갔다. 밖에 있던 김 씨의 친구가 이러한 모습을 발견한 후 김 씨의 아버지를 말리려고 하자 승합차에 타고 있던 아버지의 친구 2명이 그를 강압적으로 제어했다.

폭행이 지속되는 어느 한순간 김 씨는 그 곳에서 벗어나고자 맨발로 전력을 다해 근처 지구대로 뛰었다. 지구대에 뛰어 들어온 김 씨를 본 경찰들은 차라리 부모를 고소하라고 했다. 온몸과 눈 주위는 피멍이 들었고 안구 과다출혈도 있었다. 고막천공으로 수술까지 받아야 했다. 의사나 경찰, 진료기관 등에서는 무엇보다 김 씨가 받았을 정신적 충격을 가장 염려했다. 김 씨 또한 태어나서 처음 부모님에게 맞아봤고, 특히 죽일 듯이 때리는 아버지의 모습에 큰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당시 경찰이 딸을 왜 이렇게 심하게 때렸냐고 묻자 아버지는 “딸을 많이 사랑하니까 그랬다. 이렇게 해서라도 그 교단에서 나오게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김 씨는 “이런 말로 포장할 수 없을 만큼의 폭행이었다. 경찰도 그 모습을 보고 차라리 부모님을 처벌하라고 했다”면서 “딸이기 전에 한 인간으로서의 존재성에 의문을 가질 만큼 고통스러운 일이었다”고 말했다.

김 씨는 현재 집으로 들어가지 않고 여성보호센터에서 지내고 있다. 그는 사건이 해결될 때까지 센터에 있을 예정이며 탄원서를 준비해 청와대 등에 보낼 준비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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