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가톨릭의 상징이며 총본산인 서울시 중구에 위치한 명동성당. ⓒ천지일보(뉴스천지)

[천지일보=백은영 기자] 한국교회는 지금 쇠퇴의 길로 접어들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교단 싸움에 멍들고 교권에 휘둘려 정작 교회로서 해야 할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상처받고 다치는 교인들이 늘어나고 교회를 떠나거나 아예 신앙을 포기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복음의 씨가 어떻게 뿌려졌으며, 어떠한 과정과 경로를 거쳐 우리에게 전해졌는지 알고 있다면 작금의 상황까지는 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설사 알고 있다 하더라도 지식적으로만 받아들였지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했기에 지금 한국교회가 돈과 권력, 이권다툼에 병들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할 것이다.

◆조선, 복음을 듣다
2000년 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고 명하셨다. 예수님의 이 지상명령을 지키기 위해 제자들은 모진 핍박과 고난을 이겨내며 복음 증거하는 일에 앞장섰다. 그렇게 천국복음은 제자들에게서 제자들에게로 이어지기를 반복해 반도의 작은 나라 조선에까지 이르게 됐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천국복음이 우리나라에 들어오게 된 과정이다. 보통의 기독교 전파가 선교사들에 의한 것이라면,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들어오게 된 것은 서적을 통해서다. 이는 세계 기독교 역사상 유례없는 일로 국민 스스로가 자발적으로 신앙을 받아들였음을 시사한다. 이후 한국에서의 기독교 전개 또한 평신도들의 자발적인 운동으로 진행됐다는 점은 우리 민족이 종교성이 뛰어난 민족임을 방증해주고 있다.

18세기의 조선은 젊은 지식인들이 주축이 돼 당시 청나라(중국)로부터 들어온 서학(西學)을 통해 새로운 문명에 눈을 뜨기 시작했고, 이들 중 일부가 신앙의 차원에서 천주교를 믿기 시작했다. 이벽(李檗)·이가환(李家煥)·이승훈(李承薰) 등이 천주교를 신봉한 대표적인 학자들이었다. 이들은 유교의 근본원리인 충효(忠孝)를 바탕으로 천주교의 구세복음사상(救世福音思想)을 받아들였고, 중인(中人)과 상민을 대상으로 포교활동을 전개해 큰 호응을 얻었다.

그렇지만 천주교 신자의 수가 늘수록 천주교를 향한 조정 안팎의 박해 또한 심해졌다. 결국 조정은 천주교를 사교로 규정해 금령을 내렸고, 1791년 신해박해(辛亥迫害, 정조 15년)를 시작으로 1801년 신유박해(辛酉迫害, 순조 1년), 조선 후기 1839년 기해박해(己亥迫害, 헌종 5년), 1846년 병오박해(丙午迫害, 헌종 12년), 1866년 병인박해(丙寅迫害, 고종 3년) 등 천주교의 박해로 이어졌다. 1866년 병인박해로 시작된 천주교 박해로 1868년까지 3년 동안 약 8000명이 순교했다.

 

▲ 개화기 때 1만여 명의 천주교 신자들이 처형된 서울시 마포구 합정동에 있는 절두산성지. ⓒ천지일보(뉴스천지)


◆주님 말씀 위해서라면
조선에 나타난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는 독일 프로이센 출신의 목사 귀츨라프(1803~1851) 선교사로 1832년 충청남도 홍성군 고대도에 들어왔다. 그가 조선에 들어온 때는 순조 통치 말년으로 천주교 박해와 쇄국정책이 한창이던 시절이었으니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귀츨라프 선교사는 서민들도 글을 읽고 쓸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주기도문’을 번역하기로 결심, 오랜 기다림 끝에 ‘양이’라는 조선인을 설득해 주기도문을 한글로 번역하는 데 성공하게 된다. 몸을 태울 것 같은 7월의 뜨거운 태양도 복음을 향한 열정을 삼킬 수는 없었다. 이들은 삼복더위에도 불구하고 좁은 배 안에 숨어 번역작업에 전념했고, 드디어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가 조선 땅에 드러날 수 있었다.

귀츨라프 선교사 이후 조선을 향한 선교의 문이 열리게 됐고, 이후 조선 땅 최초의 기독교 순교자 로버트 저메인 토마스(Robert Jemain Thomas, 1839~1866)가 선교의 희망을 품고 조선으로 들어오게 된다. 성경책을 번역하기 위해 조선어를 열심히 배웠던 그는 그토록 열망하던 조선 선교의 꿈을 품고 1866년 8월 9일, 미국상선 제너럴셔먼호에 몸을 실었다. 공교롭게도 그가 조선을 향하던 때는 대원군이 천주교 금압정책(禁壓政策)에 따라 프랑스 신부 9명과 천주교도 수천 명을 죽인, 이른바 병인사옥을 일으켰던 해였다.

많은 성경책과 함께 평양에 도착했지만 대원군의 쇄국정책으로 인해 조선은 문을 굳게 잠그고 외국 선박에 대해 공격 명령을 내렸다. 이 일로 토마스 선교사는 배에 있던 24명의 선원과 함께 죽음을 맞이했다. 죽음을 앞둔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야소~ 야소’라고 예수의 이름을 외치며 배에서 내려 자기를 죽이려 칼을 든 이에게 마지막 성경을 건넸다. 그렇게 그는 1866년 9월 5일 대동강변에서 순교했다.

이후로도 조선 땅에 천국복음을 전하기 위해 자신의 조국을 떠나 낯선 이국땅에서 생을 마감하거나 핍박과 조롱을 받은 선교사들은 그 수를 셀 수 없을 정도다.

의사로서 한국을 개척한 알렌 선교사, 한국의 장로교를 개척한 아펜젤러 선교사, 미국 감리교 선교사로 이화여대를 설립한 스크랜턴(Scranton) 선교사, 평양신학교 설립자 마포삼열 선교사 등 오직 예수님이 명하신 그 명령에 따라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려 노력했던 그들이 있었기에 오늘날 우리가 지극히 거룩한 자를 만날 수 있게 됐음을 기억해야 한다.

◆복음에 목마르던 이들
한국교회 복음의 역사는 앞서 언급한 언더우드, 아펜젤러, 매킨타이어와 로스 목사 등과 같은 선교사의 직접적인 복음 전도의 공이 컸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들 선교사들의 선교에 앞서 이미 성경이 번역, 보급되기 시작했다는 것에 다시 한번 주목해야 한다.

이는 복음이 선교사들에 의해 일방적으로 증거되거나 주입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땅에 선교사들이 들어오기 전 천국복음을 듣게 된 소수의 한국인 선구자들을 통해 주체적이며, 능동적으로 이루어졌다는 말이다. 교회라는 형식적인 건물이나 외형이 아닌 말씀 그 자체를 인정하고 받아들였다는 이 역사적 사실은 우리 민족이 본래 종교성이 높은 민족이자 신앙심이 깊은 민족임을 말해주고 있다. 또한 이들은 천국복음을 나 혼자 받은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 말씀을 내 나라, 내 민족에게 전하기 위해 팔방으로 뛰고 또 뛰었다.

그 결과 한글로 간행된 한국 최초의 성경인 ‘성경직해’가 1790년경 역관 출신인 최창현(요한)에 의해 ‘성경직해광익’이라는 이름으로 간행될 수 있었다. 이는 중국에서 들여온 ‘성경직해’와 ‘성경광익’ 두 권의 책에서 필요한 부분만 번역하고 재구성한 것으로 온전한 의미의 성경번역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말씀을 알아가기 위한 노력이 엿보이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이후 1882년 심양에서 한글로 번역된 최초의 한글성경인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이 간행됐으며, 1884년에는 ‘예수성교전서’라는 신약전서 전체가 간행될 수 있었다.

성경이 번역만 되고 널리 퍼지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겠는가. 오늘날 이 땅에 복음이 전해지기까지는 선교사들 외에도 복음을 받고 그 복음을 전하러 다닌 매서인(賣書人, 권서인)의 역할도 한몫했다. 매서인은 각처로 돌아다니면서 전도하고 성경책을 파는 사람을 일컫는 말로, 이들의 주된 임무는 전도하는 것이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기독교인이자 매서인이었던 서상륜 선생은 선교사에게 한글을 가르치며 성경을 번역한 인물로 1882년 로스 선교사와 함께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을 우선 번역했다. 서상륜은 성경을 번역한 그 해 세례를 받고 정식으로 기독교인이 된다. 이후 쪽복음서들을 보따리에 메고 전국을 다니며 전도하는 일에 매진, 그의 고향 동네 솔내 사람들 대부분을 믿게 한다. 복음을 접하고 예수를 믿게 된 솔내 사람들은 그들 스스로의 힘으로 1884년 교회당을 세우고, 1886년에는 교회당 건물을 지으니 우리나라 최초의 교회다.

이처럼 삼천리강산을 두루 돌며 성경책과 복음을 전하러 다닌 이들이 있었기에 짧은 시간 내 기독교가 전파될 수 있었고, 사람보다 말씀을 먼저 받아들인 한국 기독교의 특성상 1907년 평양대부흥과 같은 부흥의 물결이 일어날 수 있었음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지극히 잘 알고 있다. 물질과 권력 때문이 아닌 오로지 말씀 하나만으로 예수를 영접하고, 믿고, 핍박과 조롱 속에서도 그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민족.

오늘날 돈과 권력, 명예에 물든 기독교 세계를 보고 있으니 혹여 한국교회가 이들의 수고를 잊고 있는 것은 아닌지 씁쓸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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