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人權)이란 무엇인가. 인간이 인간답게 존재하기 위한 보편적인 권리와 지위, 자격을 아우르는 개념이다. 이는 곧 민족·종교·귀천·이념에 관계없이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모두가 평등하게 가지는 당연한 권리다. 그러나, 우리가 인식하지도 못하는 사이에 우리 이웃들과 사회적 약자들은 부단히 억압당하고, 유린당하고 있다. 이에 본지는 ‘고발’과 ‘대안’이라는 두 가지 키워드(keywords)로 인권 보장의 해법을 모색해봤다.


 

▲ (자료제공: 한국성폭력상담소)


‘쉬쉬’하는 주변 속에 병들어 가는 여성

[천지일보=이승연 기자] 성폭력과 성희롱을 당하고도 당당히 신고할 수 없는 사회. 그런 여성의 심리를 노려 더욱 치밀하고 계획적으로 성범죄가 이뤄지고 있다. 세계로 도약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부끄러운 현주소다.

정치인부터 연예인들에 이르기까지 끊이지 않는 여성 성폭력·희롱 파문들, 그리고 가정에서 일어나는 성폭력까지, 국격 상승과 관계없이 여성인권이 유린당하는 현장은 계속 늘어가고 있다.

정보공개센터에 따르면 지난해 1년간 서울시에서 발생한 성폭력 범죄건수는 5000건을 넘었다. 문제는 성폭력 발생이 해마다 증가하고 있다는 점이다. 2008년 서울지역 성폭력 범죄건수는 총 3421건에서 2009년 3758건으로 증가했으며, 2010년에는 4940건, 2011년에는 5267건으로 5000건을 넘어서며 증가세를 멈추지 않고 있다.

자연스럽게 성폭력 피해자들도 크게 늘었다. 특히 2010년에는 2009년에 비해 피해자가 1000명 이상 증가했고 2011년에는 성폭력 범죄 증가와 비례해 피해자 수도 5000명을 넘어선 5262명으로 집계됐다.

서울의 여성인구가 517만 5180명(2011년 기준)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서울 여성 1000명 중 1명이 성폭력 피해자인 셈이다.

하지만 이 놀라운 수치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여성 성폭력의 특성상 신고로 이어지지 않고 피해자의 가슴에 고스란히 묻혀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아직도 성폭력 사건의 고소율은 10%에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맥락에서 드러나지 않은 피해자는 수십 배에 달할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 “삼촌 오는 게 무서웠어요”… 가족에 갇힌 ‘피해여성’

성폭력 사건에서 여성의 인권이 가장 무기력하게 짓밟히는 현장은 친족성폭력 사건이다.

낯선 사람이 아닌 친족이 저지르는 성폭력의 경우 오랜 기간 진행될 뿐 아니라 아동 때부터 시작되는 경우가 많아 신고로 즉시 이어지지 못하는 사례가 허다하다. 한국여성의 전화 성폭력상담소 ‘2011년 상담통계’를 보면 유아, 어린이의 친족에 의한 성폭력 상담 건수가 각각 26건(44.1%)과 69건(53.5%)으로 절반 가까이가 친족에 의한 피해였다.

더 심각한 것은 ‘가족’이라는 특이성 때문에 가정 내에서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끼치는 영향력이 상당하다는 점이다. 때문에 가족이라는 빌미로 피해 사실을 드러내지 못하게 압력을 받아 피해를 키우는 경우가 많다.

 

▲ 삼촌으로부터 두 자매가 성폭행 피해를 당했지만 수사가 제대로 되지 않고 있다고 주장하는 20대 한 여성이 지난 8일 오전 서울 경찰청 앞에서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최근 서울 미근동에 있는 경찰청 정문 앞에서 1인 시위를 벌이고 있는 20대 A씨의 사례가 그랬다. A씨의 사례는 친족성폭력 사건의 대표적인 문제들을 고스란히 안고 있었다.

7살 때부터 최근 2년까지 삼촌으로부터 성폭력과 성희롱을 당하면서도 가정의 불화가 닥칠까 누구에게도 제대로 피해사실을 털어놓을 수 없었다. 부모님의 이혼으로 아버지와 함께 할머니 댁에 살아야 했던 A씨는 삼촌의 성폭행이 시작됐던 초기 용기를 내 할머니와 고모에게 말을 꺼냈다고 한다. 하지만 “네 아버지가 알면 난리가 난다”며 오히려 A씨의 입을 막았다. 가해자인 삼촌 또한 이를 빌미로 성폭행을 멈추지 않았다.

한 성폭력상담소 관계자는 “이렇게 대부분의 친족성폭력의 경우 ‘가족’이라는 틀에 갇혀 피해자임에도 피해사실을 털어놓지 못하게 만드는 상황이 많다”고 말했다. 이어 “게다가 성인이 되어 신고하게 돼도 오히려 수사 과정에서 부적절한 대우와 편파수사 등으로 피해를 가중시키는 상황이 많다”고 덧붙였다.

A씨 역시 그동안 가족을 지키기 위해 침묵했던 사실이 아버지에게 알려지면서 경찰에 고소했다. A씨는 그러나 “경찰의 부정확한 안내와 편파수사로 가해자는 처벌을 면했다”며 “게다가 잘못된 수사로 가해자가 오히려 더 당당히 나에게 ‘옛일을 들춰 가족을 와해시키는 주범’이라며 손가락질을 했다”고 울분을 토했다.

1992년 충주에서 발생한 남녀 대학생이 여학생의 의붓아버지를 흉기로 찔러 숨지게 한 사건 역시 친족성폭력을 크게 공론화했던 사례다.

피해여성 B씨는 아버지의 강압적이고 무서운 모습에 피해를 알리려는 엄두조차 내지 못하다 대학에 들어가 사랑의 감정을 키우던 남성 C씨에게 어렵게 과거를 털어놓게 됐다. 사실을 알면서도 가해자가 가족이라는 사실 때문에 선뜻 나설 수 없던 C씨는 B씨의 의붓아버지를 찾아가 사정도 해봤지만 가해자는 오히려 적반하장이었고 이에 C씨가 살해를 저지르게 된 사건이었다.

이렇듯 한 여성으로서의 인권이 ‘가족’이라는 이름에 눌려 보호받지 못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이런 문제들을 바로잡기 위해서 여성인권단체 등에서도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지만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운영하는 쉼터(열림터)에는 여전히 근친성폭력피해여성의 입소 비율이 가장 높다고 한다.

성폭력상담소 한 간부는 “근친성폭력은 특히나 더 외부에 드러내기 쉽지 않은 문제”라며 “친족성폭력 사건을 다루는 법과 제도의 실효성을 재검토함은 물론 평등한 성문화를 만들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 법 때문에 두번 죽는 ‘성폭력 피해자’

‘성희롱쯤은 별 것 아니다’라는 인식 때문에 여성의 인권은 성희롱 현장에서 더 짓밟히고 있다. 게다가 가해자들은 끝까지 성희롱 사실을 부인하며 ‘명예훼손’ 등으로 역고소하면서 오히려 피해자들을 피의자로 만들어 버리고 있다.

이런 모습은 정치계, 교육계 등에서 더 크게 부각됐다. 사건이 알려질수록 피해자는 자신의 인권은 무시된 채 가해자가 쳐놓은 법의 올무에서 벗어나오느라 시간과 힘을 소모하고 있는 것이다.

실례로 강용석 전 국회의원은 2010년 여름 국회의장배 전국 대학생 토론회에 참석한 아나운서 지망생에게 “다 줄 생각을 해야 하는데 아나운서를 할 수 있겠느냐”고 발언해 국민의 지탄을 받은 바 있다. 이후 강 의원은 오히려 이 같은 사건을 알린 기자를 고소했으며 성희롱 사실을 인정하지 않다가 모욕죄와 무고죄 혐의로 1심에서 징역 6월에 집행유예 1년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이같이 무고혐의로 기소되는 것은 극히 최근의 일이다. 그전까지는 피해자가 오히려 명예훼손으로 역고소를 당하기 십상이었고, 정치인들은 ‘사실 부인’과 ‘역고소’ 등으로 시간을 벌어가며 정치 생활을 이어 왔다.

우근민 제주도지사 역시 피해자가 성희롱으로 신고하자 ‘명예훼손’으로 역고소에 나섰다. 그럼에도 여성가족부로부터 ‘성희롱’결론이 나자 이의신청 및 재심신청 등 행정 소송을 이어갔다. 그간 여성 피해자는 법정을 오가며 결국 4년이 넘는 시간을 보내야 했고, 우 지사는 그 기간 도지사로서의 정치 활동을 그대로 유지했다. 또한 2010년 6.2 지방선거에 다시 출마, 당선되면서 화려하게 정치권에 복귀했다.

정치권뿐 아니라 우리 사회에서 최초로 성희롱 문제를 불러일으켰던 서울대 교수 성희롱 사건에서도 역시 피해자는 가해자에게 명예훼손으로 역고소를 당했다.

성희롱뿐 아니라 성폭력에서도 이런 여성의 인권을 무시한 행동들은 이어졌다. 동국대 교수 성폭력 사건, KBS 노조 간부에 의한 성폭력 사건, 대구시립합창단 성폭력 사건 등 사회적으로 공론화됐던 많은 사건에서 피해자들은 오히려 역고소를 당해야 했다.

다행히 성폭력 가해자의 역고소에 제동을 걸 수 있는 명예훼손과 관련한 대법원 판결(형법 제310조, 예외조항, 사실로서 공공의 이익에 관한 것일 때는 위법하다고 보지 않는다)이 지난 2005년에 나왔다.

하지만 성폭력 피해자에게 ‘가해자 명예훼손 역고소’는 가장 주의해야 할 사항이 될 만큼 문제는 여전하다. 성폭력 사건에서 피해 여성을 보호해야 할 법이 오히려 여성을 두 번 죽이는 도구로 전락한 현실인 셈이다.

이에 여성인권단체 고위 임원은 “국민을 보호하고 피해자를 보호해야 할 법이 오히려 가해자의 무기로 사용될 수 없게끔 제도적인 장치 마련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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