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차산에서 가장 조망이 좋은 곳으로 알려진 5보루에서 바라본 한강 유역. 광개토대왕의 아들인 장수왕의 남진정책 일환으로 고구려군은 아차산에 20여 개의 보루를 만들어 전초기지를 삼았다. ⓒ천지일보(뉴스천지)


삼국이 흠모한 산
한강유역으로 가는 길목
고구려가 백년동안 지켜

장군 설화 많아
고구려 온달장군 숨진 곳
용마 된 아기장수 설화도


용마봉 ‘아기장수’ 전설

[천지일보=송태복ㆍ김성희 기자] 아차산과 마주한 용마산(348m) 정상 용마봉은 바위능선이 말안장을 닮았다고 해서 예로부터 말마봉 또는 말마산이라 불렸다. 임진왜란 때 남서쪽에 있던 북바위산에서 북소리가 울려 퍼지자 이 산에 있던 용마가 하늘을 날아다니며 포효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이 용마산에는 아기장수 전설도 전해진다. 삼국시대에 장수가 태어나면 가족을 모두 역적으로 몰아 죽이는 때가 있었다. 어느 날 백제와 고구려의 경계였던 이곳에서 장수가 될 재목의 아기가 태어났다. 민담에 따르면 아기 엄마가 잠시 나갔다 들어와 보니 아기가 보이질 않았다. 방안을 둘러보니, 아기가 무슨 수로 올라갔는지 선반 위에 올라가 있었고, 자세히 보니 겨드랑이에 날개가 달려있었다. 이를 본 부모는 아이로 인해 집안이 패가망신할 것이라 여기고, 논의 끝에 아기를 맷돌로 눌러서 죽이고 말았다. 이렇게 아기를 죽이고 나니 용마봉에서 용마가 나와 날아갔다고 한다.

 

 

▲ 장군의 기개를 품은 ‘큰 바위 얼굴’ⓒ천지일보(뉴스천지)


◆장군의 우국충정이 머문 산

남쪽을 향해 우뚝 솟아오른 산이라 하여 남행산으로도 불리는 아차산은 유독 장군들과 인연이 깊은 산이다. 평강공주를 만나 유능한 장수가 된 온달 장군이 생을 마감한 일화가 있는 곳이며, 마주한 용마산의 ‘아기장수’ 전설과 더불어 장군의 기개를 품었다는 ‘큰 바위 얼굴’도 볼 수 있다. 게다가 삼국이 이곳에서 오랜 세월 혈투를 벌였으니, 패했던 승했던 장군들의 충정이 묻혀있는 곳임이 분명하다.

삼국은 왜 그토록 아차산을 차지하려했던 걸까. 그 이유는 아차산에 올라서면 곧 알게 된다. 아차산은 한강 이남의 곡창지대로 가기 위한 길목인데다가 한강 주변이 한 눈에 들어오는 뛰어난 조망을 자랑한다. 식량이 귀했던 시절, 비옥한 곡창지대인 한강 이남을 누가 차지하느냐는 국가의 존폐가 달린 문제였다. 이 때문에 삼국의 장군들은 나라를 굳건히 하고 굶주림에 허덕이는 백성을 살리기 위해 이곳에서 사투를 벌였다.

 

 

 

 

온달장군이 죽은 장소로 전해지는 온달샘 석탑 ⓒ천지일보(뉴스천지)

◆온달 장군과 아차산성

아차산성은 삼국사기에 백제 책계왕 원년(서기286)에 수리했다는 기록이 있어 백제가 처음 축조한 것으로 추정되나 누가 쌓았는지에 대해 아직 논란이 많다. 산성 전체 길이는 1125m 성벽의 높이는 평균 10m 정도다.

‘삼국사기’ 온달전에 따르면 평원왕의 딸 평강공주와 결혼한 온달은 공주의 도움과 가르침을 받아 뛰어난 무예를 지니게 됐다. 얼마 뒤, 온달은 매년 3월 낙랑(樂浪)벌에서 열리는 사냥대회에서 남다른 활약을 보여 왕에게 알려지게 돼 고구려 장수로 발탁됐다. 이후 북주(北周)의 군대가 침공해왔을 때, 고구려군의 선봉이 되어 적을 격파하고 대공을 세운다. 위세를 떨치던 온달 장군은 죽령 이북의 잃어버린 땅을 찾기 위해 아차산성에서 싸우다가 신라군의 화살에 맞아 생을 마감했다고 전해진다.

고구려 군이 온달 장군의 시신(屍身)을 평양으로 옮겨 가려 했으나 장군의 한(恨)이 맺혔음인지 영구(靈柩)가 움직이지 않았다. 이에 아내인 평강공주가 아차산성에 와서 관(棺)을 어루만지며 “사생(死生)이 이미 결정되었으니 아아, 돌아갑시다”라고 말하자 그제야 관이 움직여 장례를 치를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 온달 장군이 그렇게 세상을 뜨자, 마을 주민들이 “아차! 온달 장군이 이곳에서 그만 죽고 말았구나”라고 해서 이곳을 아차산이라 불렀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그러나 최근 학자들은 온달 장군이 전사한 곳은 아차산성이 아니라 훨씬 남쪽인 충북 단양 온달산성이라는 것에 무게를 두고 있다. 현재는 온달 장군이 수복하려 했던 땅이 아차산성이 아니라 단양의 온달산성이라는 것이 당시 정황이나 삼국의 정황을 보았을 때 더 타당하다는 것이다.

한편, 백제의 수도 한산이 고구려에 함락되었을 때 백제 개로왕도 이곳 아차산성 아래에서 죽임을 당했다.

아차산성에서 만나는 고구려 유적

광개토대왕의 아들 장수왕이 남진정책의 일환으로 평양천도를 단행한 건 457년 즉위 12년째가 되던 해였다. 당시 고구려 귀족들은 평양천도를 완강히 반대했다. 그러나 장수왕은 평양성 주변과 한강 유역의 곡창지대를 확보해 경제적 안정을 누리고자 했다. 한편으로는 당시 국제적인 대국으로 성장한 백제를 견제하기 위한 행보라는 주장도 있다.

장수왕은 475년 한성백제의 수도였던 하남 위례성 지금의 풍납토성을 함락시키고 몽촌토성에 총지휘부를 구축하고 연이어서 현재 대전 월평동에 있었던 월평산성까지 백제를 몰아붙였다. 이런 고구려 남진정책의 위세가 확인된 곳이 바로 아차산성이다.

5세기 말부터 6세기 후반까지 100여 년간 고구려는 아차산성에 20여 개의 보루를 만들어 남진정책의 전초기지로 활용했다. 고구려는 백제를 위축시키고 신라의 왕을 갈아치우는 등 패권자로서 지위를 누렸다. 그러나 바로 마주한 백제군과 싸우고, 나제(신라백제)연합군과 70여 년간 힘겨운 싸움을 치르면서 힘을 잃고, 결국 나제연합군에게 아차산성을 점령당한다. 신라입장에서 보면 아차산성은 오랜 세월 고구려에 의해 치욕을 겪은 신라가 ‘화랑’이라는 정예부대와 나제연합군의 힘을 빌어 자국의 왕권까지 좌지우지했던 고구려를 이긴 곳이다. 게다가 삼국 중 가장 열세였던 신라가 마침내 삼국통일의 위업까지 달성했으니 신라로서는 참으로 뿌듯하고 의미 있는 곳임이 분명하다.

1997년부터 아차산 유적발굴이 시작된 이후 이곳에선 무려 1000점에 가까운 완형 고구려 유물이 나왔다. 색이 붉은 고구려 형식의 토기들, 그리고 그릇보다 더 많이 나오는 창, 화살촉, 칼, 도끼, 철퇴, 복발(覆鉢, 정수리 부분을 보호하기 위한 투구의 맨 윗부분) 등 무기류가 많이 나옴으로써 이곳이 주거시설이라기 보다는 군사 관련 시설, 그것도 능선을 따라 산성을 지키는 초소이자, 중무장 기병들 즉 고구려 최정예부대가 근무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게 됐다.

 

 

 

 

▲ 태왕사신기 촬영장으로 유명한 고구려대장간마을 ⓒ천지일보(뉴스천지)

아차산성을 둘러본 기자 일행은 태왕사신기 촬영장으로 유명한 ‘고구려대장간마을’에서 고구려 유적들을 관찰한 뒤 아차산 보루를 거쳐 용마봉 정상을 밟고 아차산 탐방 일정을 마쳤다.

아차산성에 남아있는 삼국의 혈투 흔적은 여전히 같은 동족끼리 총부리를 겨누고 있는 분단의 아픔을 상기시켜 기자에게 씁쓸한 느낌을 안겼다.

그러나 삼국의 분열과 지금의 남북 분단이 다른 것은 삼국은 국가의 기틀을 다져가는 초기였기에 어쩔 수없이 백성을 살리기 위한 전쟁이었다면, 현재의 남북 분단은 북한권력자들의 야욕 때문에 지속되고 있다는 점에서 하늘과 땅 차이라 할 것이다.

비록 모형이었지만, 고구려 대장간 마을에서 만난 광개토대왕 비석 앞에서는 중국의 ‘동북공정’ 만행이 떠올라 어서 통일을 이뤄 고구려 문화유산의 명예를 회복해야한다는 절박함도 들었다.

전쟁 없는 세상, 분단 없는 세상, 그로인한 사망도 애통도 아픔도 없는 세상을 바라며, 높지 않으나 깊은 얘기를 들려준 아차산을 내려왔다.

 

 

 

 

▲ 용마산 아래 위치한 평강폭포, 평강공주는 피겨여왕 김연아를 모델로 제작됐다. ⓒ천지일보(뉴스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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