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마산에서 바라본 아차산. 아차산 일대는 한강 유역을 한눈에 볼 수 있어 남진정책을 펼친 고구려군의 군사요새로 100여 년간 사용됐다. 1997년 유적 발굴 이래 남한에서는 귀한 고구려 유물이 대거 출토돼 역사적 가치가 남다르다. ⓒ천지일보(뉴스천지)

고구려군의 요새 아차산성
오랜 세월 삼국의 접전지
온달 장군 숨졌다 전해져

풍수적 위치 뛰어난 명산
한강 주변이 한눈에 보여
마니산과 함께 기도효험 커

[천지일보=송태복ㆍ김성희 기자] 서울 시내에 자리한 나지막한 산이 그토록 많은 얘기를 담고 있을 줄 미처 몰랐다.

광진구에 위치한 높이 287m의 ‘아차산’은 흔히 바보 온달이라 부르는 온달 장군이 신라군 화살에 맞아 생을 마감했다는 설화가 전해지는 곳이다.

아차산은 ‘아차(阿且)’와 ‘아단(阿旦)’ 두 이름으로 불리다가 태조 이성계가 왕이 된 후 이름을 단(旦)으로 바꾸자 임금과 같은 이름을 피하려는 의도에서 비슷한 글자인 차(且)만 쓰게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유래야 어떻든 산 이름이 독특해 이름과 관련된 재밌는 얘기도 여럿 전해진다. 조선시대 백과사전이라 불리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인왕산, 목멱산(남산), 북악산, 낙산과 더불어 풍수 명당으로 꼽히는 곳이다. 뛰어난 조망으로 인해 이승만 대통령의 별장이 이곳에 세워졌으며, 산자락에 주택가와 쉐라톤워커힐호텔이 들어서 있다. 마니산과 더불어 기도가 잘 이뤄진다고 전해지며, 이곳의 기를 받아 거부가 된 이들이 많다는 속설이 있다.

풍수나 조망을 떠나 아차산이 역사적 가치를 발하는 이유는 남한에서는 보기 힘든 고구려 유적의 보고(寶庫)이기 때문이다. 아차산은 장수왕의 남진정책 위세를 보여주는 곳이자, 나제연합군에 의해 무너진 고구려의 말로를 보여주는 곳이다.

아차산의 유래

아차산은 독특한 이름 탓에 유독 산 이름과 관련된 설화가 많다.

가장 널리 알려진 설화는 조선 명종(明宗) 때 복술가(卜術家) 홍계관과 관련된 얘기다. 홍계관(洪繼寬)이 어느 날 자신의 명(命)을 점쳐 보고는 아무 날에 횡사(橫死)할 것이라는 점괘가 나왔다. 그가 살아날 길을 찾아보니 임금이 계시는 용상(龍床) 아래 숨어 있으면 횡사를 면한다는 점괘가 나왔다. 홍계관은 왕에게 아뢰어 승낙을 받고 용상 아래 숨어 있었다. 그때 쥐 한 마리가 마당을 지나가자 왕은 홍계관에게 “지나가는 쥐가 몇 마리인지 점쳐 보라” 했고, 홍계관은 “세 마리입니다”고 답했다.

이 말을 듣고 노한 왕은 홍계관의 목을 베라 했다. 형장(刑場)에 끌려간 홍계관이 급히 점을 쳐보니 한 시간 정도만 버티면 살 수 있다는 점괘가 나왔다. 이에 형 집행을 조금만 늦춰 달라고 사정하자 형리(刑吏)가 잠시 기다려 줬다. 한편, 홍계관을 형장으로 보낸 왕이 그 쥐를 잡아 배를 갈라 보게 하니 새끼 두 마리를 배고 있는 것이 아닌가. 홍계관의 신기한 점술에 놀란 왕은 급히 신하를 보내 참형(斬刑)을 중지하라 명했다.

왕명을 받은 신하가 급히 형장으로 달려가 손을 흔들며 형을 중지하라는 신호를 보냈지만, 형리는 사형 집행을 빨리하라는 신호로 오해해 홍계관의 목을 베고 말았다. 신하가 왕에게 돌아와 결과를 아뢰자 왕이 “아차 늦었구나” 하며 매우 안타까워했다. 그 후로 사람들이 이 형장이 있었던 고개를 ‘아차고개’라 했으며, 그 고개가 곧 아차산이 되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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