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에 전통무당의 모습을 회복하고자 노력하며 힘쓰고 있는 ‘황해도 만신’ 이해경 선생을 서울 서초구 방배동 집에서 만났다. 이해경 선생이 즐겁게 이야기를 하고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대중과 소통하고자 ‘굿’을 전통예술공연으로 승화
인간문화재 김금화 선생으로부터 신내림 받은 강신무
외국인에게 제대로 된 굿 보여주고자 ‘신전’ 건축 중

[천지일보=김현진 기자] 우리에게 무당은 어떤 존재로 다가올까. 아마도 무당이라 하면 대다수가 그리 좋은 시선을 갖고 있진 않을 거다. 현재 우리 사회에서 무당은 무서우면서도 천박한 직업이라는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무당은 예부터 국가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한 나라의 안녕을 기원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해왔던 것이 무당이었다. 오늘날 무질서하게 많이 생겨난 탓에 제 역할을 못하고 변질된 점이 부정적인 인식을 갖게 했다는 목소리가 많다.

이 시대에 전통무당의 모습을 회복하고자 노력하며 힘쓰고 있는 ‘황해도 만신’ 이해경 선생을 서울 서초구 방배동 집에서 만났다.

이해경 선생은 인간문화재 김금화 선생으로부터 신내림을 받은 강신무로서, 중요무형문화재 제82-2호 서해안 풍어제 및 대동굿(황해도굿의 한 종류) 이수자다. 1991년 내림굿을 받아 황해도 무당으로 활동한 지 20여 년이 지난 지금, 꽤 이름 높은 만신으로 알려져 있다.

▲ 황해도 만신 이해경 ⓒ천지일보(뉴스천지)
특히 그는 무당인 동시에 예술인이기도 하다. 국악인 황병기, 패션 디자이너 이상봉 등이 마련한 무대에 오르는 등 세계 곳곳의 여러 굵직한 공연에 참가해 왔으며, 영화 출연, 자서전 발간, 지화 전시 개최 등 황해도굿과 문화예술을 접목시키는 다양한 활동들을 전개해 왔다.

예술 활동을 해서인지 엄숙한 느낌의 무당이라기보다는 친근한 아줌마 같은 모습이 느껴졌다. 그에게는 제자 3명이 있고, 그 중 한 명은 박수무당(남자)이다.

그가 무당의 길을 걷기까지는 참으로 우여곡절이 많았다. 집안은 천주교였고, 그는 학창시절 락음악을 좋아하는 소녀였다. 좋아하는 수준을 넘어 마니아였다. 지금과는 사뭇 다른 취향이다. 학창시절은 그래도 나름 평범하게 보냈다.

이후 그가 무당이 되기 전까지 폭풍우 같은 큰 시련을 보내게 되는 것은 20세부터다. 패션 디자이너를 꿈꾸며 대학 진학을 포기한 채 관련 공부를 하던 그는 남자를 만나게 되면서 그만 임신까지 하고 말았다.

이를 두고 이 선생은 “살아서는 결코 만나지 말았어야 할 인연”이라고 할 정도로 치를 떤다. 사연인 즉슨, 결혼식도 못 올린 채 부부로 살면서 의처증으로 거의 매일을 고통에 시달렸다는 것. 공장까지 차려 재봉틀로 이불을 만드는 일을 했는데, 남자하고만 있으면 무조건 의처증이 발동해 폭행까지 서슴지 않았다고 한다. 결국 참다 못 견뎌 이혼을 했지만, 그래도 이후에도 계속 간섭하며 의처증으로 인한 폭행은 이어졌다.

그러던 중 우연히 지인들과 보살집에 갔더니, 무당이 돼야 하는 운명이라는 충격적인 소리까지 듣게 된다. 그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어 다시는 보살집을 찾지 않았고, 그냥 그대로 살아갔다.

그러나 아무 이유 없이 밤마다 가위에 눌리고 신병(장차 무당이나 박수가 될 사람이 걸리는 병)에 앓으면서 힘든 시간을 보냈다. 엎친 데 덮친 격의 고통스런 삶이었다. 자살까지 몇 번 시도했지만, 실패로 끝나자 그는 결국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기로 했고, 35세에 김금화 선생이 아닌 다른 신어머니(내림굿을 준 무당을 일컬음)에게 먼저 내림굿을 받아 무당의 길을 택했다.

그리고 그는 지금의 예술인의 길을 걷게 되는 중요한 사건을 겪게 된다. “어느 날 굿을 하는데, 신어머니가 한 남자에게 별비라는 것을 내놓으라고 하면서 수중에 있는 돈을 모두 나오게 만드는 모습을 봤죠. 그것은 사실상 강탈이나 다름없었죠. 또 제사상에 들어가는 어과와 과일을 재탕하는 걸 보고 큰 실망을 금치 못했고, 그대로 인연을 끊었어요.”

내림굿을 받은 지 6개월 만에 발생한 일이었다. 그런 뒤 그는 예부터 내려온 제대로 된 전통무당 연구를 시작했다.

그러다 발견한 사람이 김금화 선생이었다. “김 선생님은 우리의 굿을 가장 온전히 전하며 독창적인 공연예술로서 세계에 알린 큰 만신”이라며 추켜세웠다. 말할 수 없는 어떤 사정으로 인해 지금은 만날 수 없는 사이가 된 그는 “너무나도 보고 싶고, 늘 가까이 하고 싶은 분”이라고 말해 그리움이 사무친 듯 했다.

지금의 그가 전통 예술인으로서 무당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김금화 선생의 영향이 컸다. 그는 “김 선생님은 나에게 무당의 정체성을 깨닫게 해줬고, 종교적 색채보다는 굿을 하나의 공연으로 보여줌으로써 대중들과 문화적으로 소통하고 계승시키기 위해 귀감이 될 일을 많이 하셨다”며 거듭 존경스러워 했다.

▲ 무당이면서 예술가인 ‘황해도 만신’ 이해경 선생이 2008년 4월말 충남 태안군서 열린 수산물 축제에서 풍어를 기원하는 기원제를 펼치고 있다. (사진제공: 이해경)

이 선생은 특히 젊은이들에게 굿을 알리고자 꼭 필요한 것만 보여주는 퍼포먼스를 하면서 대중과 소통을 해왔다. 또한 그는 지화(紙花)의 아름다움에 매료돼 발품을 팔아가며 종이꽃 만드는 법을 익혔고, 지금까지 4차례 정도 전시를 개최해 여러 무속지화를 선보이기도 하는 등 다양한 예술적인 감각을 자랑한다.

무당의 삶을 그린 다큐멘터리 영화에 그가 메인 테마 인물로 출연한 ‘사이에서’는 2006년 전주국제영화제 초대작으로 개봉한 뒤 큰 호응을 얻어 5개 도시의 CGV에서 개봉되기도 했다.

지금도 퍼포먼스로 대중과 소통하며 제대로 된 무당을 알리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는 이 선생은 “굿이라는 의식은 좋은 기운을 나눌 수 있는 잔치다. 또 이 시대에 가장 무당다운 행동은 타인의 상담자이자 삶의 조언자”라며 “이같이 긍정적인 시각으로 대중들이 바라볼 수 있도록 해주는 게 나의 역할”이라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사실 외국인들에게 제대로 된 굿을 보여줄 장소가 마땅치 않다”며 “그래서 크거나 화려하진 않아도 성당이나 교회처럼 누구나 편안하게 찾을 수 있는 신전을 강원도 화천군 상서면 다목리에 짓고 있다. 이르면 올 가을이나 내년 봄 완공될 예정”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답답하고 속상한 일이 있으면 그 모든 넋두리(굿에서 무당이 죽은 사람의 넋이 실려 하는 말)를 늘어놓을 수 있는 공간이 되길 바랐다.

이외수 소설가는 이해경 선생을 두고 “그는 세상을 조금이라도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 자신이 어떤 일을 해야 하는가를 끊임없이 모색하면서 살고 있는 무당”이라고 평가한 바 있다. 친근하게 대중에게 다가가며 소통하는 등 기존 무당과는 다른 행보를 보이고 있는 이해경 선생의 향후 활동이 기대된다.

▲ 올해 1월 7일 꼭두박물관에서 열린 ‘소망의 꽃’ 행사에서 황해도 만신 이해경이 굿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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