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왕산은 높이 338m의 나지막한 산이지만 화강암으로 이뤄진 위용이 경복궁과 청와대 등 임금의 터를 휘감기에 결코 부족하지 않다. 서울 시내에서는 어디서든 한 시간 이내에 정상까지 오를 수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천지일보=송태복ㆍ김성희 기자] 인왕산을 처음 마주한 소감은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仁旺霽色圖)가 튀어나온 느낌이라는 말이 가장 어울릴 듯하다. 338m밖에 되지 않는 나지막한 산이지만, 화강암으로 이뤄진 산의 위용은 청와대와 경복궁 등 왕의 터를 휘감기에 결코 부족하지 않다.

그 위에 오르면 서울 장안이 한 눈에 보이니, 무학대사가 이곳에 올라 한양을 도읍으로 정하고 경복궁 터를 정할 때의 심정도 시공을 넘어 가늠해 볼 수 있다.

인왕산이란 명칭은 산자락에 인왕사라는 절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 중종 때는 필운산이라 불리기도 해 지금도 사직공원 근처에 동네 이름으로 남아있다. 북한산 자락의 하나인 인왕산은 풍수상 우백호에 해당된다. 서울 어느 방향에서 올라도 한 시간이면 오를 수 있다.

아름다운 절경을 뽐내는 인왕산 주변에는 역사의 상처를 안은 유적이 많다. 고종이 나라 잃은 슬픔을 달래며 활을 쏜 황학정을 비롯해, 독립군들의 피맺힌 절규가 묻혀있는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이 자리하고 있다. 또한 병자호란 때 청나라 군에서 험한 일을 당한 여인들이 서로의 몸을 씻겨주던 세검정 주변 계곡까지. 유난히 나라 잃은 임금과 백성의 사연이 많은 인왕산의 이야기는 인왕산 바위만큼이나 비장하고 묵직하다.

황악정 고종이 만든 국궁 활터. 조선 고종 광무 2년인 1898년 어명에 의해 경희궁 회상전 북쪽에 지어져 활터로 사용됐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인 1922년 지금의 터로 옮겼다. ⓒ천지일보(뉴스천지)
◆고종과 국궁 활터 황학정

동이족이라 불릴 만큼 활과 남다른 인연을 가진 우리 민족. 경복궁을 지나 인왕산으로 향하는 도입부에서 국궁 활터 황학정을 만날 수 있다. 고종이 국민의 심신단련을 위해 만들어 개방했다는 황학정에는 지금도 고종의 사진이 걸려있다. 고종도 자주 방문해 나라 잃은 슬픔을 달래며 활을 쏘았다고 전해진다. 고종이 사용하던 활 호미와 화살을 보관하던 전통은 육군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원래 황학정은 조선 고종 광무 2년인 1898년 어명에 의해 경희궁 회상전 북쪽에 지어져 활터로 사용됐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인 1922년 일본이 경성중학교와 총독부 관사를 지으려고 이 활터를 철거하자 몇몇 인사들이 나서 인왕산 자락 필운동에 있는 지금의 터로 옮겼다.

황학정은 앞면 4칸, 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다. 요즘도 가끔 궁술행사를 열어 옛 무인들의 기개를 보여주고 있다.

세검정 병자호란 당시 여인들이 겪은 슬픈 사연과 지혜가 전해지는 세검정과 계곡 ⓒ천지일보(뉴스천지)
◆세검정이 남긴 슬프고도 아름다운 사연

인왕산 주변의 또 다른 명소 세검정. 상명대학교 입구에서 북악터널 쪽으로 5분가량 오르면 냇가 큰 바위 위에 자리한 정자가 세검정이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 전에 이귀· 김류 등이 광해군 폐위 문제를 의논하고 칼을 씻은 자리라고 해서 ‘세검정’ 이라 이름했다. 이 세검정 냇물에는 슬프고도 아름다운 이야기가 전해진다.

병자호란 당시 인조가 수도 한성을 버리고 피난 간 후 청나라 군은 도성의 아녀자들을 겁탈했다. 이후 인조가 삼전도에서 청나라 태종 앞에 무릎을 꿇고 항복하는 치욕을 겪고 한성에 귀경한 후 한성에 남아 있던 부녀자들에 대한 처리문제가 조정에 제기됐다. 유학의 영향으로 어떤 이유로든 정조를 잃은 여자는 자결해 자신과 집안의 명예를 지키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던 시절이었다.

당시 한 신하가 임금에게 ‘세검정 계곡에서 몸을 씻으면 지난날의 험한 일을 다 씻음 받은 것으로 인정한다는 왕의 칙령을 반포할 것’을 권했다. 인조는 이 청원을 받아들여 칙령을 반포했다. 그러나 누가 자신이 수치를 당했음을 알리고 세검정에 가서 몸을 씻을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마침내 그날, 새벽부터 한성의 모든 아녀자들은 스스로 얼굴에 흰 보자기를 쓰고 세검정으로 향했다. 험한 꼴을 당했던 아니 당했던 아이에서 할머니까지 자하문 밖 세검정으로 향했다. 그들은 함께 소리 없이 흐느끼며 서로의 몸을 닦아주고 지난 상처를 씻어냈다.

비록 치욕을 당했으나, 백성을 구하고자 했던 지혜로운 신하와 백성을 사랑한 임금, 그리고 명예와 생명을 지키고자 이웃의 아픔에 함께한 지혜로운 한국 여인네들이 남긴 슬프고도 아름다운 이야기다.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

인왕산의 또 다른 등산로인 독립문 역 주변에 자리한 서대문 형무소는 을사늑약 이후 일제가 만든 감옥이다. 1908년 경성감옥으로 만들어 1912년 서대문 형무소로 이름을 바꾸었다.

조선을 통치하려는 일제의 가장 큰 걸림돌은 깨어있는 조선 사람이었다. 일제에 저항하는 조선인을 수용하기 위해 만든 서대문 형무소는 1987년 의왕으로 이전하기 전까지 사용됐다. 안으로 들어서면 일제 때 지어진 옥사와 작업장, 전시관 등을 둘러볼 수 있다. 형무소의 담장과 문은 지금도 영화나 드라마에 자주 등장한다.

보안과 청사건물 1층에는 서대문 형무소와 관련된 자료를 모으고 있는 도서관과 기획전시실이 있다. 2층에서는 서대문 형무소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당시의 모습과 일제 때 전국 형무소의 현황 등에 관한 모형과 기록을 볼 수 있다. 옥중 생활실에는 옥에서 고문을 할 때 사용했던 도구를 비롯해 벽관이라 불리는 형벌 방을 재현해놓고 있어 체험해볼 수 있다. 지하는 고문이 이루어지던 곳으로 지금은 모형으로 재현돼 있다.

보안과 청사 외에 옥사와 공작사가 있다. 옥사 내 감옥에 직접 들어가 볼 수 있으며, 공작사 내부에는 고문체험, 재판체험, 사형체험 등을 해볼 수 있는 시설이 갖추어져 있다.

나병환자들만 모아 가두었다는 나병사가 언덕에 있으며, 이곳을 지나면 형무소에서 유명을 달리한 독립 운동가들을 기념하는 추모비가 있다. 옛 모습 그대로 보존된 사형장을 나가면 바로 옆으로 몰래 시체를 산에 내다 버리던 시구문이 있다. 시구문 입구 옆으로 여자 감옥을 볼 수 있으며, 이곳 지하 독방에 유관순을 가두었다고 전해진다.

나라를 되찾고자 처자식을 버리고 자신의 목숨까지 초개같이 버린 독립군의 원혼이 떠도는 서대문 형무소. 그래서인지 서대문 형무소를 돌아보는 내내 느껴지는 음산한 기운은 독립군의 신음소리처럼 느껴진다.

서대문 형무소를 끝으로 인왕산 산책을 마치고 둘러본 서울의 5월 하늘은 눈부시게 푸르렀다. 그러나 인왕산이 우리 민족이 다시는 겪지 않아야할 암울하고 뼈아픈 사연을 품은 까닭에 그 푸르름마저도 슬퍼 보였다. 굴곡의 세월을 이기기 위해 인왕산 바위는 그토록 견고하고 단단했어야 했나보다.

인왕산은 그 앞에 자리한 경복궁의 임금, 청와대 주인과 우리 민족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나라를 위해선 처자식은 물론 네 목숨까지도 초개와 같이 버려라. 그러나 백성에게 허물이 있거든 그 허물을 보지 말고 맑은 물로 서로 씻겨주며 상처를 보듬고 생명을 지켜야 한다”고 말이다.

인왕산이 들려준 비장한 이야기를 마음에 품고 돌아오는 길, 기자도 인왕산 바위를 닮고 싶어졌다.

인왕산 입구 인왕산 스카이웨이에서 정상으로 향하는 입구 ⓒ천지일보(뉴스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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