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세상에 하생해 용화수 아래서 세 번 법회를 열어 모든 중생을 빠짐없이 구원할 메시아를 가리키는 미륵이 ‘풍류도’의 종지부를 바라보며 짓는 미소를 표현한 작품 ‘미륵의 미소’다. 유동식 박사는 유불선 삼도의 종지부를 뜻하는 ‘한’, 즉 자기를 부정하고 초월적인 절대자와 하나가 되는 풍류도의 종지부인 ‘한’을 그림으로 표현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단군신화, 창조주 섭리 담긴 민족유산… 기독교는 문화여야”

[천지일보=강수경 기자] “원효대사가 그랬지. 갈대 구멍으로 하늘을 보고 자기가 본 것만 옳다는 거야”

“단군신화는 신화일 뿐 경전이 아니지. 그러니 종교화하려고 하면 잘못되는 거야.”

유동식 박사는 단군을 신으로 믿거나 추앙하는 것에 강한 경계심을 드러냈다. 그럼에도 단군신화에 담긴 종교적 의미는 매우 중시했다. 그는 단군신화는 우리 민족이 창조주 하나님을 깨달을 수 있도록 하나님이 우리 민족에게 주신 특별한 신화라고 여겼다.

단군신화는 물론 모든 종교를 아우르는 그의 독특한 신학적 해석은 개신교 신학자로서 ‘개혁적’이라는 평가와 동시에 ‘교계의 이단아’라는 오명을 남겼다.

단군상이 우상이라며 단군상 훼손을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 여기는 개신교인들이 예나 지금이나 적지 않기 때문이다. 일례로 개신교는 1985년 단군성전 건립을 놓고 민족종교와 극심한 충돌을 빚은 바 있다. 이후 홍익문화운동연합(이하 홍문연) 등이 단군을 민족의 구심점으로 삼자며 1997년부터 1999년까지 전국 초·중·고등학교에 369개의 단군상을 세웠고, 당시 단군상 70여 개의 머리가 잘려나가거나 훼손돼 사회적인 문제가 되기도 했다.

이같이 민족종교와 개신교가 서로 다투며 갈등의 골이 깊었기에 유 박사의 신학 노선은 생소하면서도 반가웠다.

그를 봄꽃이 만개한 지난달 중순 서대문구 대신동 산자락 아래 자리한 그의 이층집에서 만났다. 햇살이 살며시 들어오는 그의 집 거실은 책장으로 가득했다. 올해 91세가 된 유 박사는 작년에 구순을 맞아 찾아온 가족들과 함께 찍은 사진을 거실 책장 사이에 꽂아두고 있었다. 기자를 맞이하는 유 박사는 91세의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눈이 빛났고, 대화를 이어갈 때에는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그의 단군신화에 대한 해석은 매우 흥미로웠다. 우상을 숭배하는 것이라며 단군에 제를 지내는 사람들을 배척하거나 멀리하는 교계 신앙인들과는 접근 태도가 사뭇 달랐다. 그는 신학과 단군신화를 별개의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 하나님의 섭리를 읽을 수 있는 한 부분으로 여겼다.

▲ 유동식 박사. ⓒ천지일보(뉴스천지)

 

◆신과 인간이 융합해 이뤄진 ‘단군’ 

단군신화, 건국과 창조신화
창조, 하나님과 인간이 이뤄
신화에 하나님의 섭리 담겨
 
 
그는 단군신화를 크게 세 가지 부분으로 나누고 이에 대해 신학적으로 해석했다.

첫 번째 환인의 아들 환웅이 태백산 신단수에 내려와 신시를 세웠다는 부분이다. 그는 이를 “하느님과 그의 아들의 강림 신앙이다”고 해석했다. 광명을 뜻하는 한자 ‘환’은 광명한 하늘의 신 즉, 하나님으로 봤다. 환웅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뜻으로 해석했다.

두 번째는 곰이 쑥과 마늘을 먹고 동굴 속에 머물기를 삼칠일간을 했더니 여자의 몸이 됐다는 구절이다. 이에 대해서는 “지모신에 대한 신앙과 종교적 이니시에이션(initiation: 의식)의 표현이다”고 설명했다. 곰을 북방민족의 토템으로 보지 않았다. 땅에 살고 있는 천신과는 반대되는 지신으로 봤다. 동굴 속에서 쑥과 마늘을 먹고 여인으로 변했던 것에 대해서는 지모신이 일단 죽어서 창조 이전의 모태로 들어갔다가 다시 창조돼 부활한다는 ‘곡신신앙’으로 풀이했다.

마지막으로 천신인 환웅과 웅녀가 혼인해 단군왕검이 태어나 고조선의 시조가 됐다는 것에 대해서는 ‘천지융합과 창조신앙’이라고 정리했다. 하늘과 땅과 인간의 창조적인 관계구조라는 것이다. 환인과 웅녀의 혼인과 관련해서는 하늘과 땅이 융합한 것이며, 이를 통해 인간이 태어난 것은 하늘의 신과 땅의 인간의 융합에서 창조가 이뤄진 것으로 해석했다.

◆“단군신화 결국 ‘문화창조’ 보여주려 한 듯”

이 세 가지를 다시 요약하자면 먼저는 하나님이 강림해야 한다. 그 이후에는 인간이 자기 부정을 통해 성화되지 않으면 안 된다. 웅녀는 자기 부정을 통해 성화돼 거룩한 신과 결합할 수 있게 됐다. 이러한 신인의 융합을 통해 새로운 생명이 창조된 것을 단군의 출생이라고 결론지었다. 그는 신화 속에 등장하는 고대 한인들이 하나님과 하나가 됨으로 생산과 문화 창조의 소원을 이룩하고, 해마다 풍작과 전쟁 시 승리와 보호를 빌 수 있게 됐다고 봤다.

“고대 우리 민족의 궁극적인 관심은 나라를 세우고 문화를 창조하는 데 있었지. 그 창조 작업은 하나님과 인간이 결합되는 데서 이뤄진다고 믿었어. 그런데 그 인간의 탄생은 천신과 지모신의 결합에서 이뤄진다고 보는 거야.”

그는 이를 삼태극으로 표현했다. 이 삼태극이 그가 말하는 한국적인 영성을 나타내는 조형물이다. 유 박사는 이러한 삼태극적 기본구조가 고구려의 주몽신화나 신라의 박혁거세 신화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고 분석했다.

◆할아버지 따라 새벽마다 기도하며 신앙

유박사의 신학적 토대가 된 것은 그의 할아버지다. 1922년 11월 22일 황해도 평산군 남천에서 태어난 그는 서당 훈장이면서도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할아버지에 의해 새벽마다 기도를 하며 신앙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일제치하라는 시대적인 상황에서 신앙이 자유롭지 못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신학교가 국내에서는 거의 다 문을 닫아 일본으로 신학을 하기 위해서 건너가 1년을 공부했다. 하지만 일제 학도병으로 전쟁의 희생양이 될 뻔했고,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그는 한국에 돌아와 감리교신학대학교에서 신학을 배웠다.

그는 신학에만 몰두하기 위해 1958년 미국 보스턴 대학으로 떠나 신학부 석사과정을 이수한다. 이때가 바로 처음으로 유 박사가 토착화 신학에 발을 들여놓게 된 시점이다. 그는 일본에서 느꼈던 것에서는 다른 또 다른 문화적 이질감을 느끼며 고민을 하게 됐다. 일본과 앙숙이었던 한국인이 차별을 받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같은 신학을 한다고 생각하고 미국으로 건너갔지만 자신이 이방인처럼 느껴지는 것에 큰 충격을 받았다.

▲ 유동식 박사 초상화. ⓒ천지일보(뉴스천지)

◆토착화 신학의 시작… “기독교, 이론 아니라 문화여야”

유불선 이전에도 道 있어
우리 민족의 도 ‘풍류도’
선조에게 신의 뜻 알려줘

 

“충격이었어. 우리는 책에 적힌 교리를 공부하고 신학을 했지만, 그들에게는 신학이 아니라 하나의 문화였던 것이지. 기독교문화. 모든 생활 곳곳에서 기독교문화가 있었어. 우리 전통 민족문화 속에서 살면서 기독교를 이론으로만 공부했던 내게는 엄청난 충격이었어.”

그는 그 원인에 대해서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고심한 끝에 내린 결론은 우리는 우리만이 갖고 있는 고유한 문화를 토대로 신학을 설명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유대인의 하나님이 아니라 한민족의 하나님도 된다는 것을 전제로 한 ‘풍류신학’이다.

그는 천지를 창조하시고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인 하나님이 기독교가 들어오기 이전에 이미 우리 조상들에게 불교나 유교 등을 통해서 하나님의 이치가 담긴 말씀을 해놓았다고 봤다. 또한 유교와 불교의 가르침을 기독교가 모두 포용할 수 있다고 봤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논문 ‘풍류신학’을 통해 한국의 종교 문화적 유산을 하나님의 선물로 알고 이를 수렴하는 것에 대한 중요성을 재차 강조했다. 그는 하나님을 보는 시각이 편협해서는 안 된다는 말을 대해 원효대사의 일화를 통해 설명했다.

“원효대사가 그랬지. 갈대가 있는데, 그 구멍이 좁아. 그런데 사람들이 그 구멍으로 하늘을 보고 자기가 본 하늘만 옳다고 하는 거야. 작은 일부분만 보고 그렇게 주장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이야.”

◆‘줄 없는 거문고’ 소금 유동식, 소리내길 꿈꿔

유동식 박사에게는 호가 있다. 처음에는 ‘소석(素石)’이었고, 팔순이 되던 해에 ‘소금(素琴)’으로 바꿨다. 그에게 호를 지어준 사람은 고 고득순 목사다. 이 때 고 목사가 지어준 소석(素石: 계시록에 등장하는 새 이름이 기록된 흰 돌)을 고희 때까지 사용했다. 이 호를 사용하며 그는 이름이 갖는 무게에 짓눌렸다.

“신약성경에 보면 계시록이 있는데, 그 계시록에서 나오는 게 바로 소석이야.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이거든. 내가 예수님이 아니니까. 그걸 쓰자니 늘 걸렸어. 그런데 스승이 호를 지어주셨는데 안 쓰기가 뭐해서 고희 때까지 썼어.”

그는 그리스도를 뜻하는 이 호를 감당해낼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호를 고치기로 마음먹고 팔순이 되던 해에 소금(素琴: 거문고를 만드는 과정 중 줄을 달기 전 단계를 가리킴)이라 고쳐지었다.

“도연명이 늘 옆에 거문고를 끼고 다녔는데, 그게 줄이 없었어. 소리 안 나는 거문고야. 완성품 거문고를 만들기 전 단계의 거문고를 소금이라고 하는데… 소리를 못 내지.”

그는 수많은 저서와 논문을 출간하면서도 스스로를 그저 소리 못내는 거문고와 같다고 여겼다.

유동식 박사는 바쁜 생활로 목사안수를 받지 못했고, 성직자가 된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생겨 평신도가 되기로 마음먹고 평생 신학 연구와 예술에 몰두했다.

<약력>
감리교신학교 졸(신학사)
미국 보스턴대학교 대학원(S.T.M)
스위스 에큐메니칼 연구원에서 연구
일본 동경 국학원 대학 대학원 졸업(1972)
신학·종교(사)학 분야에서 문학박사학위 취득

<경력>
감리교신학대학교 강사
연세대학교 신과대학 종교학 교수 역임

<저서>
한국종교와 기독교
민속종교와 한국문화
조선의 샤머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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