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등산객이 자하동천 계곡을 따라 난 등산로를 따라 연주암에 오르고 있다. 온통 바위로 이루어진 관악산은 빼어난 절경으로 인해 소금강 혹은 서금강으로도 불리웠지만 ‘불의 산’이라는 풍수해석으로 인해 세인이 두려워한 산이기도 했다. 세월이 흘러 지금은 등산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인기 등산코스가 됐다. ⓒ천지일보(뉴스천지)

불기운 너무 강해 외면
민간풍습에도 영향 끼쳐
관악 마주한 택지 피해

봉황, 道의 나라에 출현
영원불멸 상징 ‘불새’
봉 출현하면 ‘태평성대’

◆관악의 불기운과 싸운 조선왕실

[천지일보=송태복ㆍ김성희 기자] 관악산은 예로부터 쳐다봐서도 안 될 산으로 간주되기도 했다. 풍수적으로 서울 남쪽에 있는 주작(붉은 봉황) 곧 불산 王都南方之火山(왕도남방지화산)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조선 초기 고승이자 이성계가 왕이 될 것을 예언했던 무학대사가 개성에서 한양으로 천도하기 위해 터를 보러 다닌 때 얘기다. 당시 무학대사는 왕궁이 들어설 터를 왕십리 쪽에 잡으려고 했다. 그때 갑자기 소를 끌고 나타난 노인이 소를 책망하면서 “미련하기가 무학 같다”고 하는 말을 듣고 노인이 말한 대로 지금의 위치에 도읍을 정하고 태조 2년인 1394년 조선의 정궁 경복궁을 세웠다. 그러나 관악산의 화기는 무학대사가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 경복궁을 세울 때 큰 문제가 되었다. 당시 개국 공신 정도전은 한강이 있어 관악산의 화기가 넘어오지 못한다고 주장한 반면 무학대사는 관악산의 화기로 인해 큰 재앙이 미칠 것을 예언했던 것이다. 실제 경복궁은 임진왜란에 이어 1553년(명종 8년)에도 큰 화재로 잿더미가 된 후 270년간 중건되지 못하다가 흥선대원군 때야 재건됐다.

서울의 숭례문을 경복궁 정문인 광화문과 관악산을 잇는 일직선상에 위치하게 해서 관악산이 덜 보이게 한 것도 불기운을 막기 위한 풍수적 비책이었다. 조선 태조는 한양과 경복궁의 화환(火患)을 막기 위해 무학의 말에 따라 이 산에 연주(戀主), 원각(圓覺) 두 사찰을 세웠다고 전해진다.

흥선대원군(大院君)은 경복궁 재건 당시 관악산의 불기운을 막아내기 위해, 물짐승인 해태 조각상을 궁궐의 대문이나 건물의 좌우에 안치하도록 했다. 또 관악산 꼭대기에다 우물을 판 다음, 구리로 만든 용(龍)을 우물에다 넣어서 화기를 진압하도록 했다. 관악의 주봉(主峰)인 연주봉(戀主峰)에 아홉 개의 방화부(防火符)를 넣은 물 단지를 묻은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숭례문 세로글씨는 관악 ‘맞불작전’

관악산의 화기를 막기 위한 조선 왕실의 노력은 세심하고 다양했다.

남대문을 일컫는 숭례문(崇禮門)의 현액(懸額) 글씨는 가로로 쓰는 것이 관례임에도 세로로 썼다. 숭(崇)은 불꽃이 타오르는 모습을 본뜬 상형문자다. 그리고 예(禮)란 글자를 오행(五行)으로 따져보면, 화(火)에 속한다. 화를 오방(五方)으로 따지면 남(南)에 해당한다. 이렇듯 숭례는 ‘남쪽에 불을 지른다’는 뜻이다. 즉, 관악산에 불을 지르겠다는 것이다. 숭례(崇禮)라는 글자를 세로로 쓰면 불이 더 잘 타는 모습이니 ‘이화제화(以火制火)’라고 관악산 화기에 대한 맞불작전이었던 것이다. 여기에 남대문 바로 앞에는 남지(南池)라는 인공연못까지 조성해 관악산에서 넘어오는 화기를 막고자 했다.

◆경복궁에 경회루를 만든 사연

흥선대원군은 관악산의 화기로 인한 경복궁의 화재를 막기 위해 경회루와 연못을 만들었고, 청동용에 해태, 그리고 갖가지 물(水)을 상징하는 부적까지 더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했다.

1997년 11월 경복궁 내 경회루 연못을 준설하던 이들은 혀를 내밀고 콧수염을 말고 있는 해학적인 모습의 청동용을 발견했다. 경회루의 건축원리가 기록된 경회루전도(慶會樓全圖)에 따르면 경회루는 주역(周易)의 원리에 따라 경복궁에 미칠 관악산의 화기를 억제하려고 조성됐다. 또한 경회루의 모든 구성은 음양오행 중 음(陰) 곧 물을 뜻하는 숫자 6으로 이뤄졌다. 건축 당시 경회루 연못 안에 구리로 만든 용 두 마리까지 넣었는데, 그것이 연못에서 건져낸 청동용이었다.

◆관악산 화기 받은 규수, 며느리 안 삼아

관악산의 화기는 민간 풍습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서울의 양반들이 모여 사는 종로구 가회동 일대 북촌(北村)에서는, 관악산 근처에서 살거나 관악산을 마주하고 있는 집에서 자라난 규수와는 혼인을 거절했다. 주민들 역시 관악산을 마주 보는 택지를 피한다든지, 부득이한 경우에는 친정으로 가 아이를 낳는 풍습까지 있었다. 관악산을 마주 보고 자란 여자는 불같은 성미를 지녔다고 간주했다. 이는 불이 열정적이고 가변적이기 때문에, 관악산의 화기를 쏘인 여인은 요망스럽고 음탕하여 일부종사(一夫從事)를 할 수 없으리라고 여긴 까닭이다.

 

 

▲ 효령대군이 머물렀던 연주암 ⓒ천지일보(뉴스천지)

◆군자가 머문 연주암

기자 일행은 조선시대 무학대사의 제자 열이 세웠다는 과천향교가 있는 계곡을 따라 연주암에 올랐다. 이 계곡은 조선말 시와 그림에 능했던 신위의 집이 이곳에 있어 그의 호를 따 ‘자하동천’이라 불린다. 향교에서 연주암까지 3.2㎞를 쉬지 않고 걸으면 1시간 20분 가량 걸린다. 연주암에서는 등산객들에게 점심을 무료로 제공해 주고 있다. 일행도 하산길에 연주암에 들러 점심을 해결했다.

연주암이라는 사찰 이름에 대해서는 두 가지 유래가 전해진다. 그 첫 번째는 고려 말 충신 강득룡, 서견, 남을진 등이 고려가 멸망하자 관악산 의상대에 숨어 살았으며, 여기서 멀리 개성를 바라보며 고려왕조를 그리워 해 연주대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조선 태종의 맏아들인 양녕대군과 둘째 효령대군이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는 설이다.

태종이 셋째인 충녕대군, 즉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하자 양녕대군과 효령대군이 유랑길에 나섰다가, 관악사를 찾아와 수행하면서 40칸 규모의 건물을 새로 지어 궁궐이 잘 보이는 현재의 위치로 거처를 옮겼다는 것이다. 이후에 사람들이 두 대군의 심정을 기리는 뜻에서 의상대를 연주대로, 관악사를 연주암으로 각각 부르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연주암에는 현재 대웅전과 삼성각, 그리고 종각 등의 전각과 2동의 요사가 세워져 있다. 절벽 정상에 자리하고 있는 연주대는 서울 근교에서 보기 드문 절경을 자랑하는 곳이다. 처음 이름은 의상대사가 이곳에서 수행하였다 해서 의상대라고 불렸으나 이후 조선시대에 연주대로 이름이 바뀌어졌다는 게 일반론이다.

◆풍수상 남쪽 붉은 봉황, 관악

불기운 때문에 터부시 되어온 관악산이 풍수적으로 상서로운 새인 주작(붉은 봉황)에 해당된다는 것은 역설적이다. 봉황은 동방 군자의 나라에서 나와서 사해(四海) 밖을 날아 곤륜산(崑崙山)을 지나 지주(砥柱)의 물을 마시고 약수(弱水)에 깃을 씻고 저녁에 풍혈(風穴)에 자는데, 이 새가 세상에 나타나면 천하가 크게 안녕하다고 전해진다.

얼마 전 모 풍수가는 현재 세종시 천도설이 세간에 오르내리는 것을 두고, 청와대 터는 신(神)이 있어야 할 자리며, 대통령(군주)이 있을 자리가 아니라서 천도설이 오르내린다고 주장했다. 그는 대안으로 현재 정부 과천청사가 있는 터가 청와대 터로 적당하다는 견해를 내비쳤다. 풍수적으로 봉황에 해당되는 관악 아래에 군주 격인 대통령이 오면 좋다는 풍수적 해석이 나름 이유가 있어 보인다.

주작 곧 붉은 봉황은 영원불멸을 상징하는 불새, 불사조로도 일컬어진다. 관악산이 풍수적으로 불기운을 가득 품은 붉은 봉황에 해당된 탓에 관악산은 두려운 산이었다. 인간의 힘으론 그 화기를 막을 수 없었던 것일까. 역사는 두 번의 경복궁 화재 원인을 관악산의 불기운 때문이라 말하고 있다.

관악산이 이처럼 역사적으로 환영 받지 못했음에도 오늘날 관악산 바로 아래 위치한 과천시는 풍수가들에 의해 더할 나위 없는 명당으로 꼽힌다. 게다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 1~2위를 다투고 있으니 이 또한 역사의 반전이 아닌가 싶다.

한유(韓愈)의 송하견서(送何堅序)에는 “내가 듣기로 새 중에 봉이라는 것이 있는데, 항상 도(道)가 있는 나라에 출현한다(吾聞鳥有鳳者 恒出於有道之國)”라고 기록했다. 혹여 그 옛날 도인들이 영원한 군자의 나라가 붉은 봉황 ‘관악’ 아래 세워질 것을 예언한 것은 아니었는지 기분 좋은 상상도 해본다.

불과 반세기 전만 해도 독특한 산세로 인해 세인의 미움과 두려움을 한몸에 받았던 관악산. 세월이 흘러 풍수에 연연하는 사람보다, 남다른 아름다움을 즐기는 이들이 늘면서 관악산을 터부시했던 흔적을 지금의 관악산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그래서일까, 관악산은 인고의 세월을 묵묵히 이겨낸 도인(道人)을 마주한 느낌이다. 관악산의 넉넉함과 인내의 기운을 받고 돌아오는 길에서 다시 마주한 자하동천 계곡. 그 물소리가 유난히 힘차고 당당했던 이유도 관악의 깊은 속내를 닮아서인 듯하다.

☞[SPECIAL-문화산책] 세상이 두려워했던 불의 산 ‘관악’에 오르다-① 바로가기(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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