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우 소설가 문화칼럼니스트

부산에 일본인들이 몰려들고 있다고 한다. 관광객뿐 아니라 아예 눌러 살겠다고 작심한 일본인들이 늘면서 부산에 왜인 바람이 심상찮다는 것이다. 지난 3월에는 자국민의 해외 체류 지원 업무를 하는 공익법인 롱스테이의 한국지부가 부산에 문을 열었다고도 한다. 작년 3월 동일본 대지진 이후 지리적으로 가깝고 기후도 비슷하고 문화적으로도 이질감이 덜한 부산에서 살고 싶어 하는 일본인들이 크게 늘어난 탓이다.

부산의 명물 중 하나가 광복동의 용두산 공원이다. 50미터가 채 안 되는, 산이라고 하기에는 좀 그런 야트막한 언덕에 전망탑이 세워져 있고, 거기 올라서면 부산 앞바다가 훤히 내려다보인다. 용이 바다에서 올라와 머리를 쳐들고 있는 형상이라 하여 용두산(龍頭山)이라 했다 하는데, 그게 사실은 왜인들이 만들어낸 말이다. 바다에서 땅으로 올라왔다는 용의 모습을 빗대 은근슬쩍 자신들의 침략을 미화한 것이다.

백두대간이 남으로 내달려 금정산맥에 닿고 다시 수정산 지맥으로 이어져 마침내 우뚝 멈춰선 곳이 용두산이다. 두 눈을 부릅뜬 채 부산 앞바다를 호령하듯 내려다보는 것인데, 그것은 다름 아닌 일본놈들이 또 쳐들어오지는 않나, 살피는 것이다. 일본 사람들, 적반하장도 유분수, 없는 말 지어내고 날조하는 데는 선수들이다. 아무튼 용두산을 중심으로 일제시대 이전까지 일본인들이 거주하거나 머물며 통상 외교활동을 벌였던 왜관이 있었다.

쳐들어올 때도 부산이었지만 나갈 때도 부산이었다. 해방되고 일본인들이 배를 타고 이 땅을 떠나가던 곳도 부산이다. 그래,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란 노래가 나왔을 때, 수많은 일본인들이 눈물을 흘리며 슬퍼했다는 것이다.

‘꽃피는 동백섬에 봄이 왔건만 형제 떠난 부산항에 갈매기만 슬피 우네. 오륙도 돌아가는 연락선마다 목메어 불러 봐도 대답 없는 내 형제여. 돌아와요 부산항에 그리운 내 형제여.’

노래에 나오는 ‘형제’가 자신들을 가리키는 것이라도 되는 듯 눈물을 주르륵 흘리며, “그래, 기필코 돌아가마!” 하고 주먹을 불끈 쥐었을지도 모른다.

세월이 약이라고 했다. 맞는 말이다. 요즘에는 일본 혹은 일본인들에 대한 반감이 확실히 많이 줄어들었다. 일본인들이 몰려든다고 해서 반감을 드러내지도 않을 뿐더러 오히려 지역경제가 살아난다며 아주 현실적으로 반응하기도 한다.

요즘 부산을 찾는 일본인들도 대개는 일제시대 이후의 세대들일 것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부산 혹은 한국에 대한 생각이나 느낌은 그들의 부모나 조상들과는 많이 다를 것이다. 그야말로 과거는 과거일 뿐, 서로를 있는 그대로 보는 그야말로 ‘쿨’ 한 상태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것만은 분명하다. 대륙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그들의 열망이 한 번도 식은 적이 없고 지금도 여전하다는 것이다. 이웃의 담장이 허술하거나 스스로를 지켜낼 힘이 없다 싶으면 주저 없이 침략했고 노략질했다. 대륙과 맞닿아 있고 지진으로부터 자신들을 지킬 수 있는 대한민국 땅은 그들에게 언제나 탐나는 먹잇감일 수밖에 없다.

일제는 서울을 그들의 수도로 삼으려 했다. 1933년 서울 경성제국대학 앞에 흥아연구소를 세우고 수도를 서울로 옮기기 위한 작업을 했다. 수도를 옮기기 위한 당위성과 방법, 과정 등을 문건으로 작성했고 그것이 ‘경성천도’라는 책으로 나오기도 했다. 지진 공포로 더없이 고통스러운 이 때, 그들 중 누군가는 그 시절을 회상하며 통탄할지도 모를 일이다.

평화의 시기다. 지켜낼 수 있기 때문에 평화로운 것이다. 내가 아무리 평화주의자라 목소리를 높여도, 스스로 지켜내지 못하면 평화는 없다. 지킬 힘이 없어, 야만과 굴종의 세월을 산 것이 불과 몇 십 년 전이다. 다정한 이웃이 다시 야수의 본성을 드러내는 것은 시간문제다.

꽃피는 동백섬에 일본인들이 몰려오고 있다고 하니, 그런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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