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난히 나무가 빽빽해 짐승과 새가 많았던 왕의 사냥터 청계산. 청계산에 들어서면 여전히 빽빽한 나무가 등산객을 맞이한다. 청계산 남쪽 자락에 자리한 천년 고찰 청계사에 오르면 ‘청계산은 하늘이 숨겨놓은 민족의 영부’라 기록한 안내문을 볼 수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천지일보=송태복ㆍ김성희 기자]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이다.

도심 가까이 있어 자주 오르는 산과 명소, 그 속에 숨은 역사와 뒷얘기를 안다면 건강뿐 아니라 지혜도 얻게 될 것이다.

기자가 청계산 북쪽 줄기를 따라 옥녀봉과 매봉에 오른 날은 바람이 몹시 거세 제대로 걷기조차 힘들었다. 산 중에 가장 오르기 쉬운 산이라 꼽히건만, 옥녀봉을 지나 1443계단을 밟고 매봉까지 오르는 길은 결코 만만치 않았다. 조선 성리학자 정여창 선생이 울고 넘었다는 혈읍재를 지나 망경대를 향하던 중엔 길을 잘못 들어 잠시 헤매기도 했다. 그러나 다시 길을 찾아 옛골마을을 거쳐 하산하는 길에서 마주한 맑은 시내는 이곳이 왜 ‘청계(淸溪)’인지를 새삼 깨닫게 했다.

지나는 곳곳마다 사연을 품은 청계산. 고요해 보이기만 했던 청계산은 들여다볼수록 그날 바람만큼이나 거칠고 다양한 사연을 품고 있다.

경기도 과천시 막계동과 의왕시 청계동, 성남시 수정구, 서울 서초구에 이르는 청계산은 너무 높지 않고, 가파르지 않은 흙산으로 서울 근교에서는 가장 많은 이들이 찾는 산 중 하나다. 청계산과 마주하고 있는 관악산이 남성적이라면 청계산은 여성적이요, 관악산의 불기운을 다스려 주어 과천을 풍수명당으로 만들고 있다는 것이 지관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청룡산 아래 옛 절
얼음과 눈이 끊어진 언덕이
들과 계곡에 잇닿았구나
단정히 남쪽 창에 앉아 주역을 읽노라니
종소리 처음 울리고 닭이 깃들려 하네

고려 말 학자 목은 이색이 청계산을 보며 읊은 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이 시에서 보듯 청계산의 또 다른 이름은 청룡산(靑龍山)이다.

풍수지리에서 일컫는 좌청룡 우백호의 예에 따라 과천에서는 오른편에 있는 관악산을 백호산이라 부르고, 왼편에 있는 청계산을 청룡산이라 불렀다. 또 청제산(靑帝山), 청청산(靑靑山), 청한산(靑漢山)으로 쓰인 기록도 있다.

청계산 상봉인 망경대(618m)를 가운데 두고 북쪽 줄기에는 옥녀봉(375m)과 매봉(583m)이, 남쪽 줄기에는 이수봉(545m)과 국사봉(540m)이, 서쪽 줄기에 또 다른 매봉(368m)이, 동쪽으로는 천림산(봉수대, 323m)이 있는 등 많은 봉우리를 거느린 큰 산이라 할 수 있다.

청계산 남쪽 자락 의왕시 청계동엔 신라 시대에 세워진 청계사가 있다. 그곳 안내문에 ‘청계산은 민족의 영산으로 산 곳곳에 상서로움과 정기가 배어있는 하늘이 숨겨 놓은 영부(靈府, 신령한 상서로움)’라 기록돼 있으며, 많은 이들이 청계산을 득도의 장소로 택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청계사는 고려 충렬왕 10년(1284)에 크게 중창되었으며, 연산군이 도성의 절들을 폐쇄했을 때도 봉은사를 대신해 선종의 본산 역할을 했던 유서 깊은 절이다. 청계사에 올라서면 ‘충신이 나라를 그리워했다’ 해 이름 붙여진 국사봉이 보인다.

청계사는 몇 년 전 3000년 만에 한 번 핀다는 우담바라가 피었다고 해 세간에 화제가 됐었다. 당시 사건은 과학자들이 ‘풀잠자리 꽃’이라고 밝혀 해프닝이 됐지만, 청계사 입구엔 ‘우담바라 핀 청계사’라는 안내판이 큼지막하게 자리해 찾는 이마다 ‘우담바라’처럼 마음속에 진리가 꽃 피길 기원하고 있다.

◆막(幕)을 치고 망국 개탄한 ‘망경대’ 
  목숨 두 번 건졌다는 이수봉(貳壽峰)

청계산의 최고봉 망경대(618m)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천지개벽을 할 때 큰 비로 홍수가 났는데, 관악산 꼭대기를 빼고는 모두 물에 잠겨 배를 탔다. 당시 관악산 꼭대기인 영주대(연주대)에 배를 대고 돌을 모아 그 돌로 청계산 정상을 만들었다. 하늘 아래 모든 경승을 감상할 만한 터라고 해서 만경대(萬景臺)라 불렀다’고 전해진다.

지금의 이름은 고려 말 충신 조윤이 이성계를 피해 이곳에서 막(幕)을 치고 지냈는데, 고려의 서울이었던 개성을 바라보며 망국의 한을 달래 망경대(望京臺)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망경대’와 관련된 색다른 민담도 전해져 내려온다. 예부터 청계산 망경대 아래 용의 허리 되는 곳에 묘를 쓰면 경기도 일대에 비가 오지 않는단다. 한번은 일대가 가물어 주민들이 그곳에 가봤더니, 막계리에 살던 권씨네가 그곳에 묘를 쓴 사실을 알게 됐다. 이에 마을 사람들이 묘를 파헤친 것은 물론 권씨네는 몰매를 맞고 그 집이 부서지다시피 했다고 한다.

망경대 아래 이수봉(545m)은 목숨을 두 번 건졌다는 의미다. 일두 정여창이 그의 스승 김종직과 벗 김굉필 등이 연루된 무오사화를 예견하고 이 산에 은거하여 두 번에 걸쳐 목숨을 건졌다 해서 목숨 수(壽) 자를 쓴 ‘이수봉(貳壽峰)’이라 불린다.

이수봉 남쪽에 있는 국사봉(540m)은 고려 말 이색(어떤 곳에서는 조윤)이 망한 고려를 생각하고 그리워했던 봉우리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전국에 많은 국사봉이 선비 사(士)를 쓰지만, 이곳 국사봉은 생각 사(思)를 쓴다.

국사봉에는 봉화대가 있었다거나, 어느 선비가 나라님을 그리워한 유래를 가졌다거나, 또는 나라를 위한 기도터나 도당굿터가 있었다는 등 대부분 나라와 관계 있는 사연들이 많다.

두 번째 기사 이어집니다 ☞[SPECIAL-문화산책] 충신이 피눈물 흘린 청계산… 이젠 희망의 노래만 불러다오-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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