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역사는 왜 베일에 싸여 있어야만 할까. 특히 일본은 무엇 때문에 우리의 역사를 의도적으로 없애려 했을까. 그리고 바른 역사가 고증에 의해 밝혀져도 기득세력은 왜 인정하려 하지 않을까.

우리의 역사는 유불선 사상과 함께해 왔다. 아니 그 이전엔 선(仙) 즉, 도교사상이 이 민족과 함께해 왔으며, 이는 하늘 숭배사상이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단군을 터부시 하며 극렬히 반대하고 있지만 단군사상이 바로 하늘숭배사상이요 오늘날 기독교사상의 모체였다는 사실은 미처 몰라서일 것이다. 이는 진정한 기독교인이 아님을 스스로 증명하는 셈이 된다. 오늘날 지각 있는 기독교인들이 단군사상에 대해 관심 갖는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 민족은 예부터 하늘이 함께한 민족이요, 하늘이 함께했으니 지혜와 지능이 그 어느 민족보다 탁월했을 것임은 틀림없으며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이는 우수하고 강한 민족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는 대목이다.

결국 우리 민족은 하늘에 속한 민족이었다. 따라서 그 어느 민족보다 우수하고 찬란한 역사와 문화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우리 민족의 우수성, 그 자취인 역사와 문화가 외세 또는 그 사상에 물들고 길들여져 있는 대상들로부터 소멸당하고 멸시당해야 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그중에서도 아주 특별한 역사가 지금까지 꽁꽁 묶여 있었고, 비밀로 숨겨져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 역사가 숨 쉬며 우리 앞에 진정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약 2천 년 전후로 해서, 아니 그 이전의 우리나라는 부족국가의 형태를 갖추고 있던 시대다. 물론 당시 한반도의 지형이 지금과는 사뭇 다르다는 점도 간과해선 안 된다. 즉, 내륙 깊숙이 바다가 들어와 있었으니 바닷길이 지금의 경상도 내륙까지 연결될 수 있었다는 얘기다. 이러한 때 경상도 지방에는 8개의 부족국가가 서로 경쟁하며 이웃하고 있었다. 즉, 청도를 중심으로 한 이서국, 경주를 중심으로 한 사로국, 김천을 중심으로 한 감문국, 영천을 중심으로 한 골벌국, 상주를 중심으로 한 사벌국, 경산을 중심으로 한 압독국, 의성을 중심으로 한 소문국, 울릉의 우산국 등이다. 이 여덟 부족국가 중에서 특히 ‘이서국’은 막강한 힘을 과시하던 나라다.

삼국사기 삼국유사 동국여지승람 등에 의하면 이서국은 역시 대단한 힘을 가졌던 신라(사로국)를 침공해 유리왕(제 14대 신라왕)의 간담을 서늘케 했으며, 주변의 응원군을 긴급 요청해 겨우 살아남았다는 기록이 이를 잘 뒷받침해 주고 있다.

그러나 그후 이에 따른 보복으로 신라는 주변의 부족국가들을 차례로 정벌 흡수한 후, 막강한 힘을 키운 후 비로소 이서국을 침공하게 되니, 이서국은 끝까지 오도산성(일명 오리산성)에서 저항했으나 결국 주구산성(이서산성)까지 후퇴를 거듭하다 최후를 맞게 되니, 그때가 서기 42년이다.

멸망 후 이서국의 역사와 문화는 오늘날까지 문헌에도 불과 몇 줄만이 언급되어 있을 뿐 철저히 사라져 버렸다.

그렇다면 오늘날 청도의 전신인 이서국은 어떤 나라였기에 그토록 대단했을까. 고증과 구전으로라도 이서국의 실체를 더듬어 가봐야 한다.

단군왕조가 무너지면서 이서국은 서기 42년에 신라에 멸망하기까지 약 1000년의 역사를 이어오면서 단군왕조의 뒤를 이어온 유일한 후예였다. 즉, 하늘에 제를 올리던 제사장나라의 면모를 유지해 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로 인해 지혜와 지능이 출중했으며, 한 예로 지금도 ‘철전(鐵田, 철을 다루는 마을)’이라는 마을 이름이 내려오듯이 지금으로부터 약 2000년 전 철기문화를 일으켜, 각종 병기와 농기구를 개발해 주변국의 간담을 서늘케 할 정도로 위협적인 부족국가였다.

또 청도(이서국)는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동쪽 운문산에서 서쪽에 비슬산에 이르기까지 산으로 겹겹이 둘려 싸여 있어, 그 모양이 나비가 되기 전 누에의 형국을 하고 있으며, 실제 예부터 누에를 치던 부족이었으니 비단이 주 생산품목일 수밖에 없다.

그로 인해 서역상인들이 해류를 따라 찾아 들어오게 된 곳이 바로 비단이 생산되는 이서국이었으며 바다의 ‘실크로드’를 열었던 나라다. 이는 당시 유대가 로마에 속국이 되고 유대인들이 세계에 흩어져 디아스포라가 될 때, 그중 이 실크로드를 따라 이서국에도 정착했던 것이다. 결국 하늘을 의지하던 이서국은 디아스포라가 전하는 복음을 일찍이 받아들이게 됐던 것이다.

42년에 멸망한 이서국의 왕실 즉, 정견모주는 두 아들 뇌질청예와 뇌질주일을 데리고 낙동강을 건너 지금의 고령 땅에서 육(六)가야를 세우게 된다. 여기서 뇌질청예는 김해의 금관가야를 세우니 바로 김수로왕이다. 또 뇌질주일은 일본으로 건너가 ‘대 팔주국’이라는 나라를 세우고 일본의 건국신이 된다.

여기서 ‘뇌질’이란 ‘비단에 수를 놓다’라는 뜻으로 지금까지의 모든 정황을 잘 대변해 주고 있다. 한마디로 이서국은 신라에 의해 멸망당한 뒤 가야를 세우고 또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을 건국하게 된다. 이러한 이서국과 뒤를 이은 가야는 기독교 국가였음을 엿볼 수 있으며, 김수로왕이 인도 아유타왕국의 허황후를 아내로 맞이하면서 불교가 유입되기 시작했으며, 신라로 이어져 삼국시대는 물론 고려로 이어지면서 불교가 부흥했음을 가늠케 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이서국이 기독교 복음을 받아들였다는 증거는 또 있다. 바로 예수의 12제자 중 석공이었던 도마 역시 비단길을 따라 이서국에 들어와 전도를 했으니, 그 증거가 ‘경북 영주시 평은면 강동리’에 서 있는 목 잘린 ‘도마상(象)’이다.

그래서 이 ‘이서국(伊西國)’은 동방의 이스라엘이었던 것이다.

이제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구석구석 숨겨진 우리 민족의 참 역사를 찾고 깨달아 우리의 정체성을 회복하는 일에 게을리해선 안 될 것이다. 지나간 참 역사와 문화가 우리의 진정한 미래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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