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현 주필

 

꽃이 피고 지는 것을 보면서 봄이 오고 가는 것을 느낀다. 봄이 오고 가는 것을 가장 먼저 깨닫는 것은 추위 속에서 피어나는 동백꽃이다. 동백꽃의 꽃망울이 부풀어 오를 때는 벌써 겨울의 찬 공기에 아주 미약할망정 봄기운이 뒤섞이기 시작했다고 보면 된다. 인간은 미처 감지하기도 전의 그 극미량의 봄기운에 동백꽃은 잠에서 깨어나 활짝 피어날 준비를 한다. 동백꽃의 잠을 깨운 봄기운은 차차 밀도가 높아져 겨울의 찬 공기를 따뜻하게 데우며 겨울을 녹인다. 봄은 그렇게 찾아오고 깊어지며 꿈 같이 지나간다.

동백꽃의 꽃망울이 부풀어 오르며 활짝 피어날 준비를 할 때 겨울 철새들은 먼 북쪽으로 귀향할 채비를 하느라 바빠진다. 그들 역시 떠날 때임을 본능으로 안다. 수 천리 홈커밍(Home coming) 여행을 하려면 그것을 감당할 체력이 관건이라는 것을 알기에 들판에 남은 한 톨의 곡식, 얼음이 풀려가는 강과 연못의 물고기 한 마리라도 더 먹어치우려 쫓기듯 부산을 떤다. 이처럼 절기가 변할 때는 그것을 알리는 자연의 뭇 표징(表徵)들이 나타난다. 달력의 숫자를 보고 절기의 변화를 짐작하는 것보다 그 표징들은 자동적이고 기계적이며 훨씬 더 정확하다. 그에 비해 인간의 절기의 변화에 대한 반응은 너무나 무디고 더디다. 뛰어난 이성과 학습 능력을 지녔음에도 그러하다.

겨울 철새가 한 무리, 두 무리씩 떼를 지어 북쪽 하늘로 일제히 목청을 뽑으며 날아오르면서 동백꽃은 드디어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한다. 겨울 철새가 물러가기 때문에 꽃망울을 터뜨리는 것이 아니라 무르익는 봄기운이 철새도 물러가게 하고 꽃망울도 터뜨리게 하는 것이다. 무르익는 봄기운에 대한 자동적이고 기계적인 반응이다. 동백은 봄기운을 반기지만 겨울 철새는 먼 남녘에 펄펄 끓며 머물던 태양을 뒤따르게 하고 봄기운을 멀찌감치 앞세워 북상해오는 따뜻한 봄이 싫다. 미량의 봄기운이라도 깃털을 스치면 그들은 극도로 긴장하고 예민해져 북쪽으로 밀리는 겨울을 따라 저리도록 차디찬 한냉(寒冷) 기류에 몸을 싣는다. 봄기운에 쫓긴 귀향이다. 그것이 길동무들과 무리를 지어 떠나는 여행이기에 사람들의 명절 귀성(歸省)처럼 힘은 들지만 즐거운 여행일 것 같아 보이기도 한다.

이렇게 겨울 철새가 떠나면서 동백꽃이 피기 시작하면, 드디어 파노라마 같은 계절 변화의 새 국면(Phase)인 봄이 본격 열린다. 동백꽃은 봄의 속살이다. 봄은 동백꽃을 피워 꽁꽁 숨기고 고이 간직했던 보드랍고 가녀린 선홍(鮮紅)의 붉은 속살을 수줍게 드러낸다. 그렇기에 동백꽃은 마치 꿈처럼 왔다 가는 눈 깜박하는 순간의 봄이 이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바치는 봄의 첫 순정이다. 푸르다 못해 검은 상록의 잎사귀들과 어울려 수줍은 새 각시 얼굴의 홍반(紅斑), 연지 곤지나 립스틱 짙게 바른 고운 뺨과 붉은 입술처럼 동백꽃은 피어난다.

하지만 동백꽃은 뒤따라 피는 매화나 목련, 벚꽃과 달라서 아무리 만개해 제철을 구가해도 제 잘남만을 뽐내지는 않는다. 잠시의 영화를 누리고자 한 줄기에 붙은 잎새들을 들러리로만은 만들어 놓지 않을 뿐 아니라 자신의 붉은 빛깔로 오히려 진한 녹색의 잎새들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군락을 이루어 옆에 바짝 붙어 무성히 자라는 푸른 정절(貞節)의 상징 시누대들도 붉은 순정과 절개의 꽃 동백이 있어 더욱 빛이 난다.

전설이 말하기를 ‘집안에 침입한 엉큼한 악인에 쫓긴 어부의 아내가 남편이 바다로 간 그 방향을 따라 남편을 부르며 황급히 몸을 피하다가 그만 절벽에서 떨어져 목숨을 잃었는데 그 여인을 장사지낸 무덤에서 그 겨울에 붉은 동백꽃이 돋아났다’. 동백꽃은 절개와 순정의 꽃이다. 그 동백꽃은 역시 푸른 정절의 시누대 숲이 이웃에 있어 더 붉고 아름답다. 그렇기에 동백꽃은 자신의 겸허한 아름다움으로 이웃의 풀과 나무, 잎사귀들의 아름다움을 드러내주어 더 아름다워 보이는 융숭 깊은 풍미와 품 넓은 여백을 간직하고 있는 꽃이다. 그 아름다움이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는다.

꽃이 진다. 그 붉은 겸양의 꽃, 동백꽃이 졌다. 세월이 가면서 봄날도 감을 실증해준다. 동백꽃의 꿀을 탐하던 동박새는 잇달아 피는 매화 목련 산수유 연산홍 벚꽃 진달래꽃으로 날아갔다. 동백꽃은 일찍 피었기에 그만큼 일찍 졌지만 늦게 피는 봄꽃들의 개화(開花)는 화려함을 더하며 이어진다. 그 꽃들이 피기 전 절기의 변환기 추운 날의 동박새 허기는 동백꽃의 꿀샘이 채워주었다. 대신 나비나 벌이 없을 때이므로 동백 열매를 맺게 하는 수분(受粉)의 매개자 역할을 동박새가 해냈다. 인간을 포함한 자연의 질서에 적응하고 살아가는 모든 생명들에게 공짜는 없다. 공생과 상생(相生), 조화를 위해 서로 주고받는 역할이 있는 것이며 제 몫들을 충실히 해내야 한다.

봄이 가고 세월이 가는 것이 아쉬운 것은 인지상정이지만 슬퍼할 것은 없다. 물론 살만큼 산 사람들에게는 즐거워할 일도 아니다. 그저 가는 세월에 허허롭게 맡기고 살면 된다. 꽃이 피면 즐거워하고 꽃이 지면 아쉬워하며 다음 해 또 그 꽃이 피고 질 때 그렇게 하면 그만이지 무심히 가는 세월을 탓할 것은 없다. 내년에 필 동백꽃도 그렇게 대하면 된다.

선거로 시끄러웠다. 선거가 그처럼 ‘네거티브(Negative)’ 하기는 아마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것 같았다. 국민을 편안하게 하려면 극단적인 편 가름이 아니라 어느 진영이나 보편적인 가치와 진보적인 가치를 조화롭게 추구해가는 것이 옳을 것 같은데 그 같은 상생과 국민을 편안하게 하는 정치 구호나 정책의 제시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보수와 진보가 적이 되어 서로의 가치를 극단적으로 배척할 때 보수는 답답하고 짜증나며 진보는 불안하고 무책임하다. 더구나 이념의 추구가 시대착오적인 체제의 그것을 선호하거나 그 체제에 놀아날 때 그것은 더 더욱 유익하지가 않다. 꽃이 피고 지고 봄날이 가고 세월이 가고 세상이 격변하는데 도대체 반쪽 정치를 만들어낼 것이 분명한 이념 전쟁이라는 것이 누구를 위해 필요한가. 다른 한쪽에 대한 복수와 한풀이를 위해, 그 복수를 위한 권력 쟁취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서인가. 그렇다면 복수는 복수를 부르고 파괴는 파괴를 부르는 것이므로 긍정적인 역사 가치의 축적이 생기지 않으며 역사 발전은 없다. 당장의 평화도 없다. 왜 이렇게 세상의 변화에 정치는 이처럼 반응이 무디고 더딘가. 그것이 답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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