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이병철 종교질문에 종교인 答하다

 

▲ 고 이병철 회장
지난해 종교계에 큰 파장을 일으킨 ‘고 이병철 회장 종교질문 24문항’은 인간에게 종교가 무엇인지를 다시 한 번 상기시키는 계기가 됐다. 그 후 본지에는 이병철 회장의 종교질문에 대해 여러 종단의 답을 비교해 볼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달라는 독자들의 요청이 이어졌다.

 

이에 본지는 특별기획을 마련해 그간 언론에 알려진 종교인의 답과 새로이 참여를 희망한 종교인의 답을 가감 없이 게재한다. 1차로 1~12번 질문에 대한 답을 게재하고 2차로 13~24번에 대한 답변을 게재할 예정이다. 종교질문에 답한 시기를 기준으로 순서대로 게재했다.

5. 신은 인간을 사랑했다면, 왜 고통과 불행과 죽음을 주었는가?
 

 

 

 

◆가톨릭 차동엽 신부
고통, 자유의지 잘못 쓴 ‘경고’

어쩌면 우리가 신을 사랑할 수 있는 중요한 통로가 바로 고통이다. 이슬람 최고의 신비주의 시인 루미(1207~1273)는 이렇게 말했다. ‘때로 우리를 돕고자, 그분은 우리를 비참하게 만든다/물이 흐르는 곳이면 어디든지/생명이 피어난다/눈물이 떨어지는 곳이면 어디든/신의 자비가 드러난다.’ 신은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었다. 그래서 우리는 선택을 한다. ‘신을 믿을 건가, 말 건가’조차도 선택의 대상이다. 고통의 뒤에는 선택이 있고, 그 선택 뒤에는 자유의지가 있다.

-그럼 고통은 언제 오나.

고통은 주로 자유의지를 엉뚱하게 썼을 때 온다. 우리의 선택이 신의 섭리, 그 섭리의 궤도에서 벗어날 때 고통이 찾아온다. 그래서 고통은 일종의 ‘경고 사인’이다. 신의 섭리, 우주의 존재 원리, 그 궤도를 다시 찾으라는 신호다. 가령 불에 손을 넣으면 어떻게 되나. 뜨겁다. 고통스럽다. 그래서 재빨리 손을 뺀다. 만약 고통이 없으면 어떻게 될까. 손이 다 타고 만다. 고통과 불행과 죽음은 올바른 궤도를 찾기 위한 신호다.
 

 

 

 

◆신천지 이만희 총회장
고통, 창조주 아닌 악신이 줘

이병철 씨는 종교(religion)의 뜻을 알지 못해서 한 말이다. 신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생명체이신 창조주이시고, 또 하나는 피조물인 사악의 신이다.

창조주는 자기가 창조했기에 물론 피조물을 사랑한다. 피조물인 사악의 신은 자기가 창조하지 않았기 때문에 피조물들에게 고통을 주어 창조주를 이병철 씨같이 원망하게 한다.

그러면 피조물인 사악의 신은 누군가? 신계(영계)에는 네 그룹(네 생물, 네 천사장)이 있다. 이 중 1/4의 군대를 맡은 한 그룹(천사장)이 신 곧 하나님을 배도함으로 사악의 신(사단, 마귀)이 된 것이다. 이 자가 참 하나님의 신을 쫓아내고 자기가 하나님이 되고자 한 자이다. 이 자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만물을 가로채어 주관해 온 역적 마귀이다.

창조주 참 신이 이 사실을 피조물인 사람에게 알게 한 방법이 성경책이다. 4번의 답에서 말한 바같이 언젠가 참 신인 창조주가 오시어 본래 모습으로 회복시키게 된다. 사람의 고통은 참 신인 창조주가 주는 것이 아니며, 역적 사악의 신이 주는 것이다.
 

 

 

 

◆불교 허정스님
스스로 고통과 불행 만들어

이 질문에 대해서 ‘신이 인간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혹은 ‘고통은 신이 인간을 사랑하는 통로’라고 대답하는 것은 설상가상(雪上加霜)이다. 불교에서는 인간의 고통과 불행은 스스로 만든 것이라고 말한다. 주의 깊지 못하고 깨어있지 못해 한 순간 잘못된 의도를 일으켜 악업을 짓게 된다. 신이 자유의지를 준 것이 아니기에 이러한 잘못된 의도를 일으키는 것은 오로지 자신 탓이다. 불교는 이 원리를 자업자득(自業自得)이라 한다.
 

 

 

 

◆침례교 손형식 목사
인간이 神의 사랑 거부한 결과

불순종에 의한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에서 온 것이다. 관계의 단절은 교제의 단절, 공급의 단절, 능력의 단절을 가져왔고 이것은 결국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한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한 선택에서 온 결과이다. 그러나 영이 회복되면 육이 회복된다는 것을 역사는 증명해 주고 있다.
 

 

 

 

◆민족도교 김중호 도장
이기심이 고통과 불행 초래

철없는 질문 같기도 한데, 비 신앙인들에게는 중요한 문제인 것 같다. 고통이라는 근본은 육신을 중심으로 출발한다. 육신은 이기심을 통해 기쁨을 느끼려는 본성이 있고, 양심은 선을 통해 기쁨을 느끼려는 선성이 있다. 이 두 성질이 자기 속에서 항상 싸우고 있다. 사람은 먼 곳에서 하나님을 찾지만 그것이 아니다. 자기 양심과 이기심이 맞닥트리는 그 곳에 있다.

예를 들면 길을 지나가는데 할머니가 무거운 짐을 놓고 쉬고 있다. ‘저 할머니가 오죽하면 저렇게 하고 있을까 우리 할머니, 어머니 같은데’라고 보자마다 그런 느낌이 든다. 첫 번째 양심에서 타협을 한다. 양심에서 도와주자고 한다. 육신의 이기성은 거기에 대해서 반항을 한다. 도와주지 말고 가자고 한다. 몇 초 사이에 자기 속에서 혼란이 일어난다.

육신의 이기심이 이겼다고 보자. 찬 돌에 앉아 있는 할머니를 두고 지나가면 양심이 육신에 욕을 한다. 저 할머니가 이모와 할머니였다면 그럴 수 있겠는가 하는 양심의 공격이다. 그러면 세포가 짓눌려 발걸음이 무거워진다.

반대로 양심이 이겼다고 해보자. 이 사람이 앉아서 만 원짜리 하나 꺼내주면서 ‘집은 없으십니까. 자녀는 없으십니까. 해장국 잡숫고 일어나십시오’라고 하면 세포가 하늘과 손을 잡은 것 같아서 기분이 구름 위를 걷는 것 같다. 하늘의 선성을 받아 기분이 좋은 것이다. 콧노래가 나온다. 이러한 두 가지 예가 언제나 일어난다. 종교를 통해서 선을 통해서 선을 하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인간의 본래 양심의 자리를 확장시켜서 인간의 이기심을 죽이는 게 고통을 회복시켜주는 것이라고 본다. 고통이라고 하는 것은 후자의 예같이 도와주고 가는 사람은 소통이 잘 돼서 병이 잘 안 걸린다. 양심의 기혈이 막히면 병이 유발된다. 고통이라고 생각하는 부분은 육신에서 오는 것이다. 양심적으로 산 사람들은 만약에 고통이 생긴다고 해도 그 고통조차도 수용을 한다. 고통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좋은 쪽으로 생각해서 승화시킨다.

모든 고통은 육신 때문에 오는 것이다. 이기심을 통해서 불행과 고통이 오는 것이다. 고통이라고 생각하는 부분은 누구나 갖고 있다. 육신을 중심삼고 이기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돈이 많고 행복하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것이지 하늘의 원천적인 것과는 관계가 없다. 고통은 신이 준 게 아니다. 불행과 고통이라는 생각 자체가 양심 속에는 없기 때문이다. 육신의 이기심 속에서 소유하지 못해서 부의 욕망을 충족하지 못하는 데서 나오는 것이 고통과 불행이다.

[출처]
천주교 차동엽 신부-중앙일보 2011년 12월 17일자
신천지 이만희 총회장-본보 2011년 12월 28일자
불교 허정스님-불교닷컴 2011년 12월 30일자
침례교 손형식 목사-워싱턴 한국일보 1월 7일자

[정리= 강수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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