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으로, 교육자로 한평생 생명을 사랑한 바위 같은 이여-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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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마의 시 세계-생명

청마(靑馬, 푸른 털의 말)라는 호의 유래에 관한 설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노작(露雀) 홍사용(洪思容)이 지어주었다는 것인데, 홍사용이 유치환을 보고 “글쎄, 자네가 마면(馬面)이니 청마라 함이 좋지 않을까” 했다는 것과 다른 하나는 부잔(豊山)중학교 시절 같은 학급의 학생이 작품을 <청마(靑馬)>라는 동인지에 발표한 것을 보고 암시를 받았다는 것이다.

청마가 된 유치환은 1931년에 시 <정적(靜寂>을 <문예월간> 제2호에 발표하면서 문단에 데뷔한 이래 제1 시집인 <청마시초>(1939, 청색지사), 제2시집인 <생명의 서(書)>(1947,행문사), 제3시집인 <울릉도(鬱陵島)>(1948,행문사), 제4시집인 <청령일기>(1949), 제5시집인 <보병과 더불어>(1951, 문예사), 제6시집인 <예루살렘의 닭>-수상록이지만 사실상의 제6시집으로 봐야함, 제7시집인 <청마시집, 1954,문성사>-<기도가>와 <행복은 이렇게 오더니라>를 합본 한 것인데 청마는 이를 두 권의 시집으로 간주함, 제9시집인 <제9시집>(1957,한국출판사), 제10시집인 <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1960,동서문화사), 제11시집인 <미루나무와 남풍>(1964,평화사) 등을 통해 100여 편의 시를 발표했다.

100여 편에 달하는 청마의 시 중 대부분이 ‘사랑’ ‘생명’ ‘사회’에 관한 것들이다. 이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3기로 구분되는 그의 시 생애 중에서 ‘사랑시’들은 제1기와 제2기에, ‘사회시’들은 제2기에 주로 쓰여 졌지만 ‘생명탐구의 시’들은 1기, 2기, 3기를 통틀어 일관성 있게 쓰여 졌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시에서 ‘사랑’과 ‘사회’는 ‘생명’의 다른 의미였으므로 결국 유치환의 시가 관심을 가졌던 본질적 문제는 생명과 존재의 해명으로 요약될 수 있다고 한다. 청마를 미당 서정주와 함께 생명파(生命派)라고 하는 이유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동무’는 빨갱이나 쓰는 말

청마가 경주고등학교의 교장으로 있던 시절의 일이다.

1958년 봄, 경주고등학교 학생들과 경주로 수학여행을 온 서울의 어느 고등학교 학생들이 물리적인 충돌을 빚은 일이 있었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또 여차여차 하여 경주고 학생 몇 명이 경찰서에 구금상태로 조사를 받게 되었다고 한다.

이에 경주고 대표 학생들이 경찰서에 친구 면회를 가서 ‘동무면회 하러 왔다’라고 말한 것을 경찰들이 꼬투리를 잡아 “동무, 동무, 누가 동무라고 가르치더냐? 너희 교장…… 너희들 말하는 것 보니 빨갱이 아니냐”라고 호통을 치더라는 것이다.

어린 학생들의 말에 경찰들이 과민반응을 한 이유는 바로 경주고의 교장이 청마였기 때문이다.

청마는 4·19 직전인 1960년 3월 13일자 ‘동아일보’에 이승만 독재정권에 맞서 고고한 의지를 담은<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란 시를 싣는다. 바로 이승만 독재 정권이 3·15선거에 정·부통령의 당선을 위해 국민들의 자유와 인권을 극도로 탄압하던 때에 말이다.

그러니 경찰의 눈에 청마가 곱게 보일 리가 있고, 청마의 제자들의 말인들 옳게 들릴 리가 있겠는가?

교직을 <큰 나의 밝힘>의 정신으로

청마는 29세가 되던 1937년 향교재단이 운영하는 통영협성상업학교 교사가 되면서 교직에 발을 딛는다. 이후 북만주로 갔던 기간(1940년 3월~1945년 6월)과 한국전쟁(한국전쟁 때는 국군 제3사단 제23연대 소속으로 종군(從軍)하여 원산, 함흥전선까지 가면서 많은 전쟁시들을 씀)을 제외하고는 거의 교직에 재직한다.

특히 44세 되던 1952년에 경남 함양의 안의중학교 교장이 된 후로(1954년 4월 30일부터 1955년 3월 31일까지 경북대학교 문리과대학에서 강의도 하였음) 1967년 2월 13일 불의의 교통사고로 사망하기 전까지 여러 학교의 교장을 역임했다.

청마는 교장으로 재직하면서 <큰 나의 밝힘>이라는 지표를 제시했는데 이는 다음과 같이 풀어볼 수 있다고 한다.

‘나란 나의 힘으로 생겨난 내가 아니다. 나란 나만으로서 있을 수 있는 내가 아니다. 나란 나만에 속하는 내가 아니다’ 또 이것을 요약하면 ‘나를 부정함으로써 타자(他者)를 받아들여 ’큰 나‘를 구현하여 밝혀야 한다’는 것이라고 한다.

청마는 ‘나’는 나 혼자로서 태어난 존재가 아니며, 또 혼자서는 이세계에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깊이 깨달아 ‘큰 자아의 완성(나의 완성)’을 실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자신이 발 딛고 사는 사회에 관심을 갖고, 타인을 사랑하는 눈으로 바라보며 시인으로서, 교육자로서 생명력이 넘치는 글을 꿋꿋하게 써온 청마 유치환. 그것이 그의 시들이 시대를 넘어 여전히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울리고 있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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