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故 탄허스님 (사진제공: 탄허대종사기념박물관)

“덕으로 다스려야 국민이 따른다”

[글마루=김지윤 기자] 대선의 해인 2012년, 새해 벽두부터 ‘전당대회 돈봉투’ ‘디도스 테러’ 등 정치계에 파문이 일고 있다. 일제강점기와 6.25전쟁 이후 경제성장을 중심으로 빠르게 발전한 대한민국은 정치적으로 아직 건전하고 진정한 민주주의를 이룩하지 못했다. 이는 전 국민적으로 공감하는 바이다.

끊임없이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정치계에 올바른 사람이 서길 바라는 것은 전 국민적인 바람이다. 첨단시대이지만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한국 정치계에 국사 탄허스님은 어떻게 조언했을까. 그는 늘 덕치(德治)를 강조했다.

“導之以政(도지이정)하고 齊之以刑(제지이형)이면, 民免而無(민면이무)니라. 導之以德(도이지덕)하고 齊之以禮(제지이예)면, 有恥具格(유치구격)이니라”

‘논어’ 위정(爲政)편의 글귀다. ‘형법과 정치로만 다스리면 백성이 죄짓는 것은 근근이 면할 수 있지만 그 잘못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도덕과 예로 다스리면 백성이 잘못했을 때 양심의 가책을 받아 부끄러워하고 스스로 개과천선하게 된다’는 뜻으로 앞말은 세속 정치를, 뒷말은 성인군자의 정치를 각각 뜻한다. 이는 서양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동양 고유의 ‘덕(德)’ 사상에서 비롯된다.

1977년 조선일보가 진행한 신춘대담에서 탄허스님은 올바른 정치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동양사상의 정치는 왕도의 정치와 패도(覇道)의 정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왕도의 정치란 성인의 정치를 말하는 것인데 하도 그 덕화(德化)가 커 백성이 누구의 덕으로 사는지까지를 잊어버리는 경지를 말하는 것이지요. 패도의 정치는 백성이 각기 그 처소(處所)를 얻어 다 잘 살기는 하지만, 단 부국강병(富國强兵)의 야심이 위정자의 뇌리에 잠재해 있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왕도정치를 ‘학정(學政)종합’, 패도정치를 ‘학정분립’으로 보고 있다. 즉, 최고의 학문도덕을 가진 성인이 정권을 잡을 때 비로소 나라가 평안해진다는 논리다. 반대로 학정분립은 최고의 학문과 도덕을 가진 성인이 초야에 묻히고 소인들이 정권을 잡는 것을 말한다. 당신은 현명한 위정자를 꿈꾸고, 염원하고 있는가. 새로운 정권이 들어서기 전, 탄허스님 발언을 다시금 꺼내어 보면서 진지하게 고민해 보자.

이치 깨닫고 앞일 내다봐

최근 해일, 대지진 등이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면서 탄허스님의 예언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스님이 예고한 예언이 다시금 조명되는 것은 그 내용이 구체적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놀라운 점은 자신이 열반하는 일자와 일시(1983년 6월 5일 오후 6시 15분)를 맞혔다는 것이다.

먼저, 그가 남긴 예언은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간방에 간도수가 접합되면서 한국은 어두운 역사를 끝맺게 된다. 인류 역사의 처음과 끝이 한국에서 이뤄진다.
·소녀인 미국은 성장해도 부인 정도밖에 될 수 없다. 이런 점을 볼 때 미국이 우리나라를 돕는 것은 마치 아내가 남편을 내조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남편을 성공하게 한다.
·지금은 결실의 시대다. 열매를 맺으려면 꽃잎이 져야 한다. 꽃잎이 지려면 금풍이 불어야 한다. 금풍은 서방에서 부는 바람을 뜻한다. 우리나라가 미국의 도움으로 인류 역사에서 열매를 맺는다. 아울러 세계사의 출발은 한반도에서 이뤄진다.
·현재 중국 영토에 소속된 만주와 랴오둥(요동)반도 일부가 장차 우리 영토로 다시 회복될 것이다.
·일본 열도의 3분의 2가량이 바닷속에 침몰될 것이다.
·한반도의 동해안은 해일과 지진으로 침몰하는 대신 서해안이 한반
도 2배로 융기된다.
·오래지 않아 한반도는 국운이 융성해지고 위대한 인물들이 나타나
조국을 통일하고 평화로운 국가를 건설할 것이다.

탄허스님은…

탄허스님의 속명은 김금택으로 전북 김제 만경에서 유학자 김율제 선생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13세까지는 정읍의 증산교의 일파 차천자교(車天子敎)에 있는 서당에서 한문과 서예를 배웠다. 득도하겠다고 결심한 후 14세 때 충청도 기호학파 최대 유학자인 면암 최익현 선생의 문하 이극종 선생에게 유교를 배웠다. 하지만 진리를 찾고 싶었던 그는 방한암 대선사가 있는 상원사로 들어가 학문을 닦았다.

금택은 새벽 2시가 되면 어김없이 일어나 반드시 참선을 하고 경전을 읽었다. 이를 입적하기 전까지 49년간 한결같이 했다. 처음 몇 년은 스승 한암선사처럼 참선했으나 만족하지 않았다. 결국 한암선사에게 정식으로 승려가 되겠다고 삭발을 했다. 이때 그는 스물둘의 청년이었다. 선사는 제자에게 ‘삼킬 탄(呑)’ ‘빌 허(虛)’, 즉 ‘탄허’라는 법명을 하사했다.

탄허스님으로 다시 난 이후 3년간 묵언하면서 번뇌를 떠나는 일, 즉 참선에만 몰두했다. 그러나 선(禪)은 앉아서도, 이력이 붙으면 서거나 걸어 다니면서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자 그는 경(經)을 택했다. 스승은 제자에게 “지식이 있는 자는 경을 배워 중생에게 이익을 주도록 해야 이 세상 업보도 갚는 것”이라며 경전의 중요성을 설명했다.

선에서 진리를 찾고자 했던 탄허스님은 스승의 가르침을 곱씹으면서 범어, 즉 산스크리트어를 배워 경전의 참뜻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통달하게 됐다. 스님은 스승이 ‘중생에게 이익이 되게 하라’는 말을 가슴에 새기고 실천으로 옮겼다. 그는 불경을 번역하는 ‘역경사업’을 지속했다.

이로 인해 불경의 한국화 및 현대화를 이룩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탄허스님의 주요 공적은‘불경 번역’이다. 총 78권을 번역했는데 이는 조선시대 역경을 진행했던 신미대사(1403~1480)의 역경보다 많은 수다. 진리를 찾기 위해 늘 경전을 들여다보고 통달한 것을 중생에게 쉽게 알리기 위해 노력했던 한국계의 큰스님. 그리고 국사로서 나라와 국민을 걱정하고 염려한 스님. 오늘날 우리는 이러한 현자를 기다리고 바라고 있지는 않은지 다시금 되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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