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故 탄허스님(사진제공: 탄허대종사기념박물관)

[글마루=김지윤 기자] 여느 유명한 스님 또는 지식인과 사뭇 다르다. 오로지 손에 쥔 분필로 판서하며 장자의 ‘소요유(逍遙遊)’를 강연한다. 단상엔 장자와 관련된 자료를 찾아볼 수 없다. 불자뿐 아니라 지식인도 스님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일흔에 가까운 큰스님은 쩌렁쩌렁하고 명확한 목소리로 강연한다. 막힘없이 이어지는 명쾌한 설명에 모두 ‘아! 그런 뜻이었구나’ 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그들의 눈이 초롱초롱해진다.

중생衆生의 공허함, 성현聖賢의 가르침으로 채우다
유불선儒佛仙 통달해 전국 지식인 몰렸다

故 탄허스님(1913~1983)의 지식에 감탄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 ‘도(道)’를 찾고 자신이 들렀던 길을 사람들이 쉽게 접할 수 있도록 원문을 그대로 살린 해석집 78권을 내놓는 데 평생 힘썼다. 그래서 법회와 강연엔 불자뿐 아니라 당대 지식인도 함께했다. 더군다나 스님은 강연 자료를 따로 만들지 않는다. 머릿속에 있는 내용을 입으로 토해낸다. 그의 관심은 오로지 ‘인재’를 양성하는 데 있다. 그래서 ‘공부하러 온 사람’을 구분하지 않았다. 남녀노소, 지위를 막론하고 배움에 갈급한 이들이 찾아오면 찾아오는 대로 성현들의 가르침을 내주었다. ‘공허함을 삼키다(呑虛)’라는 법호답게 그는 후배 승려와 중생의 허(虛)한 부분을 성현의 가르침으로 채울 수 있도록 길을 연 셈이다.

삼라만상 품는‘화엄경’과 그 변화를 설명·예측하는‘주역’품은 선견자

큰스님의 이력이 독특하다. 분명히 불교의 고승인데 주역을 비롯한 역술, 풍수 도참, 선도교에도 식견이 풍부하다. 아니, 풍부한 식견 이상으로 각 경전과 책을 통달했다. 오죽하면 스님의 주전공이 불경의 정수 ‘화엄경’이고 부전공이 ‘주역’이라는 말까지 나왔을까. 큰스님은 이통현(李通玄, 635~730)과 청량국사(淸凉國師, ?~839)의 화엄경 주석을 종합해 ‘대방광불신화엄경합론(大方廣佛新華嚴經合論)’ 49책을 풀이했다. 계속 언급했듯이 불가를 넘어서 다른 분야에서도 학구적인 면모를 보였다. 선가(禪家)의 입장에서 주역을 풀이한 ‘주역선해(周易禪解)’ 3권을 펴낸 바 있다. 이러한 연유에서 큰스님이자 사상가로 주목받고 있다.

만물의 현상을 품는 화엄경과 그 현상의 변화를 설명하고 예측하는 주역을 모두 지닌 탄허스님. 그는 60~70년대 국사 역할을 했다. 평소 ‘삼라만상은 마음이 만들어 낸 것(一切唯心造)’ ‘부분이 즉 전체, 전체가 즉 부분(一卽多 多卽一)’이라는 화엄경을 본체로 하고 앞일을 예측하는 주역을 수단으로 삼아 나라의 미래를 예견했다.

주역을 보는 큰스님 이야기를 더 살펴보자. 탄허스님은 주역의 육효(六爻)를 사용해 점을 치는 육효점에 일가견이 있었다고 한다. 육효점은 점서(占書)의 전통을 충실하게 계승한 점으로 공자, 주렴계, 주자, 서경덕, 토정과 같은 학자들과 구루(Guru, 힌두교와 시크교의 지도자)들이 앞일 내다보는 데 활용했던 방법이다. 주역을 그리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 불가에서 이를 통달한 고승이라. 일반 고승과는 다르다. 신라 말 최치원은 유불선을 아우르는 ‘포함삼교(包涵三敎)’를 주장했는데 탄허스님이 이를 계승했다. 정확히 말해 유교의 ‘예(禮)’, 불
교의 ‘명심(明心)’, 선교의 ‘양생(養生, 심신 수행)’을 섭렵했다. 다양한 가르침을 수용한 그에게 전국 방방곡곡에서 내로라하는 인사들이 찾아왔다. 무속인, 한학의 대가, 무술인, 의학인, 정치인, 예술가 등 스님을 찾는 직업군도 가지각색이다.

사람이 사는 법‘예(禮)-법(法)-정(精)’

“사람이 사는 ‘법’이란 게 굳이 있을까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끊임없이 제기되는 물음이다. 결국 ‘산다는 게 무엇인지’ ‘왜 사는지’에 관한 근본적인 질문과 일맥상통하다. 탄허스님은 사람이 사는 것, 즉 인생을 예와 법, 정으로 구분한다.

“예는 ‘하늘의 이치’를 가리킵니다. 이때 세속의 예로 이해하면 곤란해요. 불가에서는 이 같은 삶을 대인군자(大人君子)와 물아양망(物我兩忘)으로 봅니다. 다시 말해 우주와 자신을 잇는 성인의 경지를 말하죠.”

불가에서 법은 물아양망의 경지엔 이르지 못하지만 자신의 이익보다 이타적인 면을 보이면서 세속 법규에 조금도 어긋나지 않게 사는 사람을 뜻한다. 정은 예와 법을 모르고 오로지 인정(人情)으로만 살아가는 사람을 말한다. 탄허스님은 이 같은 중생을 ‘천치’ 같은 사람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세속에서 사는 인간 대부분은 천치일까.

“괴로워도 길은 길이오”

진리는 길(道)로 종종 표현된다. 이와 관련해 제자 향봉스님이 스승에게 “길이 있을까요”라고 질문했다.
“환한 길이 바로 보이지. 도(道)의 근본은 바른 것이니까. 도란 진리의 대명사가 아니겠나. 한마디로 길을 가리킨 거야. 길을 걷되 길 밖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경계해야 하네. 왜냐하면 길이란 오르막길이든 오솔길이든 내리막길이든 외진 길이든 길은 길이 아니겠나. 그런데 길 밖으로 빠져나가면 진흙덩이와 가시덩굴 속에서 갈팡질팡하게 되겠지. 어둠 속에서 방황하면 얼마나 괴롭겠나. 탈선이란 어느 의미에서도 괴로운 결과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돼. 길은 또 하나의 생명줄일세. 생명을 아끼려거든 자신이 선택한 길을 꾸준히 걷는 강인한 인내심이 필요하지. 그래야 목표에 도달할 수 있다네.”

진리를 찾으려거든 지금 걷는 길에서 벗어나지 말라는 스님의 말에서 잔잔하지만 단호함이 느껴진다. 이어 스님은 도(道)에서 더 나아가 덕(德), 인(仁), 의(義), 예(禮), 법(法)의 상관관계에 대해 전해 내려오는 옛말을 들어 중생에게 알려준다. 사람이 가장 고차원적인 ‘도’가 없으면 ‘덕’이라도 갖춰야 하고, ‘덕’을 잃으면 ‘인’을 베풀 줄 알아야 한다. ‘인’이 부족하면 ‘의’라도 지켜야 하고 ‘의’를 잃으면 ‘예’라도 차려야 한다. 하지만 요즘 시대엔 ‘도’보다 한참 차원이 낮은 ‘예’를 눈 씻고 찾기 어렵다. 그래서 나온 것이 ‘법’이다. 한마디로 우리에게 제약을 주는 법은 몽학훈장에 지나지 않음을 의미한다.

진리는 시간과 장소를 막론하고 변하지 않는다. 어느 곳을 가더라도 해는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진다. 비는 하늘에서 내리며, 모든 만물은 성장한다. 자연의 순리는 진리다. 이를 거스르는 자연물은 없다. 가장 간단하고 이치적인 순리가 가장 고차원적인 진리인 셈이다. 탄허스님은 누구보다 이를 일찍 습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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