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철 큰스님 (사진제공: 김영사)

깨달음을 향한 구도의 여정 

[글마루=김명화 기자] 우리 시대 큰 어른 성철스님. 치열하다 못해 혹독한 참선 수행으로 참다운 구도자의 모범을 보여주셨던 큰스님은 1993년 11월, 중생들 곁을 떠나 열반에 들었다. 20년간 성철스님을 시봉(侍奉, 부모나 스승을 받들어 모심)했던 원택스님에게 큰스님의 참선과 법어, 그리고 삶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 나의 스승, 성철 큰스님”

“내 인제 갈란다. 내 할 일은 다 했다…….”
1993년 입동이 들어설 무렵, 성철스님은 팔십 평생 걸치고 다녔던 육신을 털고 열반에 들었다. 법랑 58세, 세수 82세가 되던 해였다. 편안히 누워 입적하는 방법 대신 앉아서 숨을 거두는 좌탈(坐脫)의 자세로 숨을 거두신 성철스님. 큰스님은 떠나시면서 마지막으로 열반송을 남겼다.

涅槃頌(열반송)

生平欺誑男女群(생평사광남녀군)하야
彌天罪業過須彌(미천죄업과수미)라
活陷阿鼻恨萬端(활도아비한만단)인데
一輪吐紅掛碧山(일륜토홍쾌벽산)이로다.

일생 동안 남녀의 무리를 속여서
하늘 넘치는 죄업은 수미산을 지나친다
산 채로 무간지옥에 떨어져서 그 한이 만 갈래나 되는데
둥근 한 수레바퀴 붉음을 내뿜으며 푸른 산에 걸렸도다.

“말씀을 마치시고 큰스님은 스르르 눈을 감으셨지요. 말릴 수도, 돌이킬 수도 없는 그 순간…저는 참 무기력했어요.”

원택스님은 20여 년 동안 성철스님 곁에서 시봉하며 살았다. 열반에 든 지 10여 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스승에 대한 존경과 그리움은 쉬 사그라지지 않는 듯하다.

“마음을 다해 시봉한다고 했지만 살아 계시는 동안 왜 좀 더 잘 모시지 못했을 까……. 다비장에서 한줌의 재로 돌아가시는 큰스님을 바라보니 만감이 교차했었지요. 아직도 가야산을 쩌렁쩌렁 울리던 벼락같은 큰스님의 목소리가 귓가에 생생한데….”

원택스님, 그리고 성철스님의 길고도 짧은 인연은 지금으로부터 3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부처님과 맺은 언약 “출가”

“야, 이 곰 새끼야.” “밥 도둑놈, 밥 값 내놔라.”

성철스님은 가르침에 어긋난 일을 했거나 마음에 차지 않는 일을 하면 어제 온 행자나 20년 된 스님이나 가리지 않고 질책하셨다고 한다. 원택스님이 성철스님을 처음 만났을 그때도 상황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웬 놈들이고?”

스님이 된 친구를 만나러 우연히 해인사에 들른 28세 앳된 청년 원택을 본 성철스님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물었다.

“처음 뵙게 되었습니더. 기념으로 평생 지남(指南, 이끌어 가르침)이 될 좌우명 한 말씀 해주이소.”

당돌한 청년의 답에 성철스님은 대뜸 좌우명을 받으려면 법당에 가서 부처님께 일만 배를 하라고 했고, 오기가 발동한 청년 원택은 “좋심더”라며 수습하지 못할 약속을 하고 말았다. 인연은 이치 없이 생기지 않는 다던 연기설(緣起說)처럼 이 사건을 계기로 대학을 갓 졸업한 대구 청년 원택과 해인사 주지 성철스님은 사제간의 연을 맺는다.

“큰스님의 가르침대로 도(道)를 이룰 때까지 해인사 백련암에서 다시는 내려가지 않을거라 굳게 마음먹고 출가했지요.”

느리고 느긋한 심성을 가진 제자와 급하고 격한 성품을 가진 스승의 20년 동행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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