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엔 독립군의 희망가로

우리네 부모가 날찾으시거든/ 광복군 갔다고 말전해 주소
광풍이 불어요 광풍이불어요/ 삼천만 가심에 광풍이불어요
바다에 두둥실 떠오는배는/ 광복군 싣고서 오시는배래요
동실령고개서 북소리 둥둥나더니/ 한양성 복판에 태극기 펄펄날려요
-광복군아리랑-

[글마루=김지윤 기자] 이 아리랑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제목부터 심상치 않다. 무려 ‘광복군아리랑’이라고 불리는 노래. 대체 어떤 장단과 가락으로 불리는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정선아리랑 가락으로 불러보기도 하고, 본조아리랑으로 불러보기도 하지만 어색하다. 알고 있는 아리랑을 다 동원해서 불러보지만 곡조가 어울리기는커녕 장단이 맞지 않는다. 고민하던 중 밀양아리랑의 가락에 가사를 붙이니 제 옷처럼 딱 맞다. 그렇다. 일제강점기에 살던 독립·광복군들은 흥겨움과 한이 담긴 밀양아리랑 곡조에 자신들의 애환을 실었다.

시대 반영하는 아리랑

아리랑 가운데 밀양아리랑은 팔색조다. 시대와 목적에 따라 다양하게 불리고 있기 때문이다. 앞에서 본 것같이 광복·독립군에게는 희망가로 불렸고, 정부에는 의전가, 민주화 운동이 한창일 땐 통일가 등으로 모습을 조금씩 달리해왔다. 60여 종의 아리랑 가운데 밀양아리랑은 정선아리랑, 본조아리랑, 진도아리랑과 함께 4대 아리랑으로 꼽힌다. 게다가 밀양에서만 불리던 아리랑은 일제강점기를 겪으면서 한민족의 대표 아리랑으로 자리매김했다.

밀양아리랑을 포함한 아리랑은 한(恨)과 낙(樂)이 함께 담겼다. 기쁠 때도, 슬플 때도 한민족은 아리랑을 찾았다. 민족의 희로애락이 아리랑에 담긴 셈이다 . 아리랑이 곧 한민족의 정서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기서 궁금증이 생긴다. 많고 많은 아리랑 가운데 왜 밀양아리랑이 유명할까 . 이와 관련해 차상찬(1887~1946) 교수는 “밀양의 아리랑타령은 특별히 정조가 구슬프고 남국의 정조를 잘 나타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처럼 구슬픈 이야기를 담고 있는 밀양아리랑은 ‘아랑’처녀에 대한 이야기다. 억울하게 살해당한 처녀가 원한을 알리기 위해 원귀로 나타나 동네에 해를 끼쳤다. 이 소문을 들은 담대한 사람이 원귀를 만나 그 설움을 듣고 해결해 주었다는 전설이 밀양아리랑의 바탕이다.

태생부터 한을 지닐 수밖에 없는 밀양아리랑이었기에 독립군들 사이에서 불렸나 보다. 일제의 감시하에 모든 아리랑은 수모를 겪었다. 아리랑이 한민족의 애국심을 일으킨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중국과 로령지역에선 ‘독립군아리랑’과 임시정부에선 ‘광복군아리랑’, 한유한의 창극 ‘아리랑’이 동포들 사이에서 밀양아리랑의 곡조로 불리고 있었다.

(후렴)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요/ 독립군 아리랑 불러나보세
이조왕 말년에 왜난리나서/ 이천만 동포들 살길이없네
일어나 싸우자 총칼을메고/ 일제놈 처부셔 조국을찾자
내고향 산천아 너잘있거라/ 이네몸 독립군 따라가노라
부모님 처자를 리별하고/ 왜놈을 짓부셔 승리한후에
태극기 휘날려 만세 만만세/ 승전고 울리며 돌아오리라
-독립군아리랑-

밀양아리랑의 흔적은 의외의 곳에서 발견되기도 한다. 바로 6.25전쟁 당시 미국을 대적하고 북한을 지원하는 중국이 밀양아리랑의 곡조를 이용해 심리전을 펼친 것이다. 이 아리랑은 1954년 중공군이 발행한 <조선가요집(朝鮮歌謠集)>에 실렸다.

남조선 바라보니 가슴아프나/ 북조선 백성은 행복하다네
이승만 머리는 뾰족하고/ 김성주 머리는 표주박같네
백두산 공화국 깃발날리고/ 제주도 한라산 유격대가섰네
아가씨 날좀보소 자세히보소/ 겨울에 핀꽃같잉 사랑해주오
그런마음 가진 당신 나는 좋아/ 꽃가마 오며는 당신을따를게
나는야군인 그대 사랑할수없네/ 그대위한 꽃가마 없어 결혼은못하네
유격대 고사리 맛있는데/ 미국의 서양요리 나는싫어
오이농장 고슴도치 휘젓는게싫고/ 조선 인민은 이승만이싫어요
금강산을 탐내는 미국이여/ 침략만 해봐라 다리를자르리
‘항미원조(抗美援朝)-파르티쟌 유격대 아리랑’

투박하면서도 쾌활한 아리랑

밀양아리랑의 매력은 음악성과 형식보다 ‘밀양’이라는 지역성을 꼽을 수 있다. 서정매 부산대(국악과) 교수는 “지역성에서 형성된 아리랑으로 사설의 ‘투박함’과 선율의 ‘쾌활함’이 밀양아리랑의 특징”이라며 “수용과 변용론에 따라 현재 대부분 지역에서 경기소리로 밀양아리랑을 부르고 있지만, 밀양에서는 ‘지게목발’로 소리를 내면서 밀양적인 아리랑을 부르고 있어 정체성을 확립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밀양에서 부르는 아리랑은 ‘날 좀 보소’의 질러대는 선율에 가사를 붙인 것이다. 소리를 지르는 것은 긴장과 강조이며, 이는 맺힘에서 풀림으로 이끈다. 밀양아리랑이 지닌 독특한 맛이다. 여기에 ‘지게목발소리’라고도 불리는 ‘아리당다꿍 쓰리당다꿍’은 밀양 특유의 사투리로 즉흥적인 흥을 돋우고 있어 생동감을 일으키고 있다.

끊임없이 진화하는 아리랑

1900년대 초에 태어났다는 밀양아리랑은 시대에 발맞춰 진화한다. 그러면서도 한민족을 배반하지 않고 지조를 지킨 아리랑으로 불린다.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이 아리랑을 강압적으로 훼손해 ‘변질된 아리랑’을 만들었지만 밀양아리랑만큼은 독립군들이 그 곡조를 차용해 결연한 의지를 담은 아리랑을 부르고 다녔다. 그렇다면 21세기형 밀양아리랑은 어떻게 진화해야 할까.

김연갑 (사)한민족아리랑연합회 상임이사는 “밀양아리랑의 가치는 오늘이 아닌 내일에 있다”며 “밀양아리랑은 통일을 전망하고 세계화를 이끄는 노래로 계승돼야 한다”고 조언했다. 아울러 아리랑은 기본적으로 ‘삶의 노래’이기에 자연 상태로의 회귀와 생태 문제를 감당하는 문화에 밀양아리랑이 중추역할을 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아랑 처녀의 원귀설부터 독립군들의 노래까지 밀양아리랑은 수난과 환희, 격동이 엇갈린 한민족사와 함께했다. 다른 아리랑이 친일화로 변질됐을 때에도 밀양아리랑은 독립군들의 입에서 입으로 불리고 사기를 높이는 매개체가 됐다.

억울한 사연을 지닌 아랑처녀가 목 놓아 ‘날 좀 보소’를 내지를 때 나도 모르게 어깨가 들썩인다. 슬픔을 기쁨으로 표현할 때 그 애잔함은 더욱 깊은 법. 이는 한(恨)을 낙(樂)으로 승화하는 민족성을 반영하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그 정서가 이어져 광복군아리랑과 독립군아리랑 등이 나타난 것은 아닐까. 끝으로 밀양아리랑의 원래 가사를 한 글자씩 음미하면서 그 가치를 곱씹어 본다.

아리 아리랑 쓰리 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고개로 넘어 간다.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동지섣달 꽃 본 듯이 날 좀 보소.
정든 님이 오셨는데 인사를 못해 행주치마 입에 물고 입만 방긋.
남천강 굽이쳐서 영남루를 감돌고 벽공에 걸린 달은 아랑각을 비추네.
영남루 명승을 찾아가니 아랑의 애화가 전해 있네.
밀양의 아랑각은 아랑넋을 위로코 진주의 의암은 논개충절 빛내네.
저 건너 대 숲은 의의한데 아랑의 설운 넋이 애달프다.
아랑의 굳은 절개 죽음으로 씻었고 고결한 높은 지조 천추에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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