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재약산 사자평 (사진: 최성애 기자)ⓒ천지일보(뉴스천지)

마루대문 양산 통도사·밀양 만어사

[글마루=김일녀 기자] 통도사는 모든 불자에게 마음의 고향으로 통한다. 어떤 것으로도 깰 수 없고 그러면서도 모든 것을 깰 수 있는 다이아몬드(금강석)와 같은 것이 진리이다. 불법을 통해 일체중생 에게 깨달음을 주고자 했던 부처의 사리가 모셔진 금강계단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절터의 유래 속에는 우리나라가 불교와 필연적인 땅임을 드러내려는 의도에 따라 석가의 삶이 투영돼 있다. 밀양 만어사와 함께 두 사찰에 숨겨진 인연담을 찾아가보자.

오랜 세월 넘어 석가와 통하는 통도사

아직 해도 뜨지 않은 이른 아침, 서울을 출발해 경남 양산 통도사로 향했다. 서서히 밝아오는 여명을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통도(通度)’라 하면 법도를 통했다는 것인데 무엇을 깨달았기에 ‘통도’라는 이름을 붙였는지 궁금해졌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라는 성경 한 구절도 떠올랐다. 그러고 보면 불교의 핵심인 자비도, 기독교의 진리인 구원도 모두 인간에 대한 사랑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어디선가 들은 바를 토대로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이번 여정을 통해 얻을 깨우침이 기대가 됐다.

이른 출발 덕분인지 예상했던 시간보다 일찍 양산 땅을 밟았다. 통도사로 가는 길, 저 멀리 펼쳐진 산맥이 예사로 보이지 않는다. 속세가 범접할 수 없는 웅장함이 감돌면서도 물결치듯 부드러운 능선이 겹겹이 이어져 일행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바로 통도사 뒤편으로 병풍처럼 둘러선 영축산이다. 영축산은 원래 석가모니 당시 인도 마가다국(Magadha) 왕사성의 동쪽에 있던 산 이름이다. 이 산에서 석가는 ‘묘법연화경’을 설법하여 많은 중생을 구제했는데 이 장면은 불교에서 가장 추앙받는 광경으로 꼽힌다. 통도사를 창건한 자장율사는 ‘이 산의 모습이 인도의 영축산과 통한다(닮았다)’는 의미에서 절 이름을 통도사로 지었다. 신용철 통도사박물관 문학박사에 따르면 실제 두 산의 위쪽에 있는 바위의 생김새가 서로 비슷하다고 한다.

통도사 입구로 들어서니 소나무숲길이 시원스레 나 있다. 길 양쪽으로 늘어선 소나무의 짙은 초록빛에 청량감이 감돌았다. 숲길은 차도와 보행자도로로 나뉘어져 있어 보행자도로를 따라 걸어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한결 편안해 보였다. 그러면서도 묵언의 수행을 하는 듯 가벼운 말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여느 사찰에서도 볼 수 없는 불자들의 모습에 행동이 조심스러워졌다. 소나무숲길을 지나오니 반달 모양의 아담한 삼성반월교가 통도사로 들어가는 첫 문, 일주문으로 가는 길을 안내했다. 사찰 주변은 깨끗하고 아늑했다. 번잡한 마음까지 정돈되는 느낌이 들었다. 이런 마음을 엿보기라도 한 듯 스쳐 지나가는 한 무리의 관광객이 “절이 어쩜 이리도 아늑한 지, 첫눈에 반해버렸어”라며 감상을 쏟아냈다.

일주문과 천왕문을 지나 사찰 안으로 들어서니 곳곳의 불전에서 불경 외는 소리와 목탁 두드리는 소리가 경내를 가득 메웠다. 속세의 소리는 더 이상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치열함마저 느껴졌다. 범종루와 삼층석탑 등을 지나 통도사의 주 건물인 대웅전에 이르기 전 마지막 문인 불이문(不二門)에 다다랐다. 불이(不二)는 ‘둘이 아닌 경지’ 즉 생과 사, 만남과 이별과 같은 상대적인 모든 것들이 둘이 아닌 하나라는 뜻이다. 궁극적으로는 부처와 중생이 다르지 않음을 상징한다고 한다. 일명 ‘해탈문’으로도 불리기 때문일까. 여기까지 이르러서도 버리지 못한 속세의 작은 번뇌조차 다 털어버리라는 주문이 들려오는 듯하다. 불경 외는 소리와 목탁 두드리는 소리가 경내를 가득 메웠다. 속세의 소리는 더 이상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치열함마저 느껴졌다.

크고 작은 전각들을 지나 드디어 대웅전에 이르렀다. 닫힌 문을 조심스레 열어 보았다. 안에는 열댓 명의 불자들이 절을 올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이 바라보는 곳에는 당연히 있어야 할 불상이 없었다. 어두운 대웅전을 희미하게 밝혀주는 직사각형 모양의 작은 유리창이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그곳을 향해 연신 절을 올렸다. 그들의 시선을 따라 까치발을 들어 빼꼼히 살펴봤다. 어스름한 가운데 시선을 사로잡는 곳이 있었다. ‘아! 저 거구나.’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 유리창 너머로 뾰족한 탑의 일부처럼 생긴 것이 보였다. 바로 석가의 진신사리가 모셔진 금강계단의 윗부분이다. 순간 내가 선 이곳에서 석가가 있는 저곳까지 오랜 세월이 넘어갔다. 보이는 것이 아닌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이 불자들의 믿음과도 통(通)하는 순간이었다.

신용철 박사는 “금강계단은 불제자가 될 사람에게 그 이전에 행했던 죄를 물로 씻는 관정의식과 또 앞으로 부처의 법을 지키며 살겠다고 다짐하는 수계의식을 행했던 장소”라고 설명했다. 예수가 물가에서 사람들에게 세례를 준 것과 같다고 했다. 그러고 보면 부처든 예수든 그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서는 먼저 죄를 씻어야 했던 것이다. 그 이후에야 제자로서 지켜야 할 법도 받고, 또 그것을 지키겠다는 약속도 할 수 있었다는 말이다.

그는 이러한 율법정신을 담고 있는 금강계단이 통도사의 핵심이며 그렇기 때문에 통도사가 우리나라 계율종의 중심사찰이 된 것이라고 했다. 자장이 법사가 아닌 율사(계율을 정한 스님)로 불리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신 박사는 또 “금강계단에서 ‘금강’은 다이아몬드를 말하는데 이는 다이아몬드의 특성처럼 어떤 것으로도 깰 수 없지만 또한 어떤 것도 깰 수 있을 만큼 단단한 부처의 진리를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여기서 잠깐, 대웅전 동쪽 방향에 섰다면 이제까지 지나온 문들을 향해 고개를 돌려보자.
통도사 건축에서만 느낄 수 있는 한국건축의 백미를 발견할 수 있다. 일주문부터 천왕문, 그리고 불이문과 대웅전 동쪽 방향까지 완만한 곡선으로, 마치 활이 휘어진 듯 이어져있다. 그야말로 ‘통(通)했다’는 표현이 딱 들어맞는 순간이다. 이러한 시각적 효과 덕분에 통도사 초입인 천왕문에서도 사찰의 가장 안쪽에 자리한 대웅전의 꽃창살을 볼 수 있다. 이는 남북은 좁고 동서로는 강을 끼고 길게 이어진 절터의 지형상 특징을 그대로 살려지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구룡지 전설 본래 통도사 절터는 9마리의 용이 사는 큰 연못이 있던 곳이다. 그런데 이 용들이 곡식을 상하게 하고 백성을 괴롭게 하자 자장율사가 이들에게 설법하여 여덟 마리는 승천케 한 후 그 연못을 메워 금강계단을 쌓았다. 지금의 구룡지는 나머지 한 마리가 굳이 남아 터를 지키겠다고 하여 연못 한 귀퉁이를 남겨두어 머물도록 한 곳이라고 한다.

만어사 만어떼가 들려주는 해탈의 종소리

이어 통도사와 마찬가지로 부처와의 필연을 유래로 간직한 사찰이자 밀양의 3대 신비 중 하나인 만어사(萬魚寺)를 찾았다. 해발 670m 정도의 만어산에 위치한 만어사는 통도사의 말사이기도 하다. 만어사로 가는 비포장도로를 따라 구불구불 오르다 보면 푸른 이끼를 입은 너덜겅(돌이 많이 깔린 비탈)의 돌들을 만나게 된다. 그러나 어느 산에서나 볼 수 있는 흔한 돌이 아니다. 어디서 깎였는지 모르게 대체로 둥그스름하고 자동차 크기만한 바위부터 맷돌만한 돌들까지 모두 파도가 넘실거리듯 만어사를 향해 있다. 멀리서 보면 마치 바닷속 물고기 떼와 닮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 만어석(萬漁石)이다.

만어사 앞쪽으로 펼쳐진 만어석의 여정이 궁금해진다. 바다에서 올라온 것인지, 땅에서 솟아난 것인지 ‘이 산중턱에는 어쩐 일이냐’고 조심스레 두드려본다. 둔탁한 소리가 난다. 그렇게 옮겨 다니며 청하기를 몇 차례, 이번에는 두드린 흔적이 남아 있는 돌을 골라 두드려 본다. 순간 맑은 쇳소리가 난다. “이거다!” 보물이라도 발견한 듯 나도 모르게 탄성이 절로 나온다.

수억 년 전 고기떼가 들려주는 심해(深海)의 소리다. 부처의 설법을 듣기 위해 바다에서 올라온 이들이 이렇듯 종소리를 낼 수 있는 것은 해탈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표시가 아닐까. 저 멀리선 이보다 더욱 청아한 종소리가 들려온다. 실제 돌들 가운데 3분의 2가량은 맑은 쇳소리나 종소리, 옥소리를 낸다고 한다. 세종대왕 때 편경(돌을 깎아 만든 조각들을 매달아 두드려 소리를 내는 악기)을 만들 때도 이곳의 돌을 가져다 쓴 것으로 전해진다.

지질학적으로 이 돌들은 2억 년 이전의 고생대말 중생대 초 생성된 녹암층이라 불리는 퇴적암의 일부다. 그래서 청석(靑石)이라고도 한다. 해저에서 퇴적된 지층이 반복된 해침과 해
퇴로 풍화작용을 일으킨 후 빙하기를 몇 차례 거치는 동안 지금과 같은 암괴들을 형성해 벌
판을 이루게 됐을 것이라는 게 학자들의 추론이다. 실제 젖은 옷을 이 만어석에 널어 말리면 바닷가의 비린내가 난다고 한다.

만어사의 전설 중에는 흑룡과 관련된 이야기가 있다. 수로왕 때 사람을 잡아먹는 나찰녀(악귀)가 본래는 바다에 살다가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만어산에 머물면서 옥지에 살고 있는 독룡(흑룡)과 서로 왕래해 뇌우와 우박을 내려 4년 동안 오곡이 결실치 못하게 했다고 한다. 우리나라 속담에도 ‘독룡이 지나간 자리는 가을 역시 궁핍한 봄이다’라고 하여 다된 일을 망쳤을 때를 ‘독룡’으로 비유하기도 한다. 이에 수로왕이 부처를 청해 설법했더니 흑룡과 나찰녀가 돌로 변했고 때마침 큰 홍수가 일어 동해의 용들과 수많은 물고기가 이곳으로 올라와 돌로 변했다는 것이다.

이는 통도사 구룡지에 전해 내려오는 전설과도 비슷하다. 그러고 보니 올해가 60년 만에 한 번 찾아온다는 임진년 용의 해, 그것도 흑룡의 해다. 이 때문에 상서로운 일들이 많이 일어날 것이라고 기대하는 분위기가 곳곳에 만연하다. 그런데 만어사의 전설처럼 예전부터 내려오는 속담이나 설화를 보면 용이 꼭 숭배의 대상이나 유익한 존재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임진년 새해를 전후로 사람들의 기대심리와 맞물려 ‘흑룡 마케팅’ 열기가 뜨거운 가운데 일각에서는 상술에 지나지 않는다며 곱지 않은 시선을 보이기도 한다.

재약산 사자평 고원에서 만난 하늘 길

밀양시 단장면에 위치한 통도사의 말사 표충사. 사찰 내로 들어서니 그야말로 ‘천혜의 요새’라는 표현이 딱 맞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표충사를 둘러싼 산세는 기골이 장대한 의병들이 병풍처럼 믿음직스럽게 서 있는 모습을 떠오르게 할 만큼 웅장했다. 이곳에 모셔진 3대 선사의 기개가 절을 감싸고 흐르는 듯 범상치 않은 기운마저 느껴졌다.

표충사란 명칭은 헌종 5년, 사명대사의 8세 법손인 천유선사가 임진왜란 때 나라를 구하기 위해 헌신한 사명·청허·기허대사 등을 기리고자 밀양시 무안면 표충사 사당에 있던 세 승려의 진영과 위패를 옮겨와 모시면서 고쳐 부르게 됐다. 사자평 고원 재약산 산마루 약 800m 지점에 있는 18만여 평의 넓은 고원에 펼쳐진 들판이다. 재약산은 수미봉(해발 1108m)과 사자봉(1198m)으로 이뤄져 있고 사자평은 두 봉우리 사이에서 완만한 타원형의 언덕들로 이어진다.

일행의 시선을 사로잡은 표충사 뒤로 펼쳐진 재약산에 오르기로 했다. 신라 흥덕왕 4년에 흥덕왕의 셋째 왕자가 병을 얻어 전국 방방곡곡의 명산과 약수를 찾아 두루 헤매다 이곳에 이르렀단다. 왕자는 영정(靈井)약수를 마시고 병이 낫게 됐는데 그 뒤로 이 산을 재약(載藥)산이라 부르게 됐다고 한다. 일행도 산 어딘가에 있을 영정약수를 찾아 산행에 나섰다. 겨울산행이라 하지만 이상하게도 일행 외에는 등산객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지금은 폐쇄된 산행코스를 따라 일행이 올라간 것이었다. 약수는커녕 길조차 찾지 못할 뻔했다. 길이 난 듯 나지 않은 듯 흔적만 남아 있는 산행코스에는 다행히 이 산을 올랐던 이들이 남겨놓은 이정표가 있었다. 드문드문 나뭇가지에 매인 산악회 리본이 일행의 유일한 안내자가 됐다. 두려움과 걱정으로 수많은 생각이 마음을 짓눌렀다. 그래도 지체 없이 올라야 했다. 그렇게 길을 찾아 가다 보니 어떤 일이든 처음으로 길을 만들어 가는 이의 고충이 얼마나 심했을지 생각하게 됐다. 그 길이 얼마나 외롭고 두려울지,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 얼마나 치열할지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데 조금 더 올라가니 이제는 리본마저도 보이지 않는다. 가파른 산세를 헉헉거리며 오르자니 이러저러한 잡생각도 잊은 지 오래다. 오로지 빽빽한 나뭇가지와 바위틈 사이로 어렴풋하게나마 보이는 하늘만 바라보고 오를 뿐이다. 하늘이 활짝 열리기를 간절히 고대하면서 말이다. 드디어 재약산 정상으로 향하는 능선 길에 들어섰다. 오솔길처럼 길이 뚜렷하게 나 있다. ‘길이다!’ 길이 이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이제 이 길만 따라가면 목적하는 정상에 이를 수 있다. 앞서 걸어간 이들이 만들어 놓은 이 길이 참으로 소중하게 다가왔다.

능선 양쪽으로는 푸른 하늘과 맞닿아 채색화를 그린 듯 부드럽게 이어지는 산맥이 장관이다. 이것이 영정약수가 아니겠는가. 능선을 따라 걷다보니 천황산 정상을 알리는 돌비석 앞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동남쪽으로 펼쳐진 사자평 고원은 이곳이 정상임을 잊게 할 만큼 드넓었다. 가을이면 장관을 이룰 억새 군락지가 고된 산행에 지친 일행을 반겨주었다. 사자평이라는 이름은 ‘사자가 뛰어내리려고 잔뜩 도사린 모습과 닮았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사자봉’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불법의 진의 헤아려 나라를 구한 사명대사

마지막으로 이번 탐방에서 가는 곳마다 뒷 배경처럼 따라다니는 인물이 있어 그가 태어난 곳으로 향했다. 구국의 승장 사명대사다. 사명대사는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왜적에 약탈당했던 통도사 금강계단의 진신사리를 일본에서 찾아와 계단에 다시 모셨다. 그리고 표충사는 임진왜란 당시 3000여 명의 승병을 이끌고 호국불교 의 중심이 됐던 사명대사의 본거지다. 또 그가 승병들을 훈련시킨 곳이 사자평이기도 하다.

사명대사는 금강산에서 수도하던 중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각처에서 승의병을 모아 700여 명의 승군을 훈련시켰다. 의승도대장이 된 사명대사는 1593년 명나라군과 더불어 평양성~개성~서울을 되찾는 공을 세운다. 전쟁이 끝난 뒤인 선조 37년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당시 일본의 새로운 위정자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만나 8개월 동안 머물면서 성공적인 외교성과를 얻었고 3000여 명의 조선인 포로를 데리고 귀국했다. 그때 대사는 일본 조정에서 천주교 신부를 처음 만나 서로 염주와 은제 십자가를 교환했다고 한다. 이것이 우리나라에 들어온 최초의 십자가다.

한가지 재미있는 점이 있는데, 스님들의 영정 대부분은 그 얼굴에 수염이 없는데 사명대사의 영정에만 덥수룩한 수염이 그려져 있다. 신용철 박사에 따르면 사명대사는 승려임에도 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일으켜 나라를 구하고자 했고 일본으로 건너가 사로잡힌 백성들을 구해오기까지 하자 이에 감동한 선조가 그에게 벼슬을 내렸다고 한다. 당시 유생들은 승려인 사명대사가 말도 타고 다니고 수염까지 기르는 모습을 보면서 못마땅해 했지만 선조는 끝까지 사명당을 지켜줬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는 긴 수염을 가진 사명대사를 만날 수 있게 된 것이다.

사명대사는 불법에서 금하는 ‘살생(殺生)’을 문자 그대로 보지 않았다. 임진왜란 당시 그는 “중생의 구제 없는 법맥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며 임금에게 승병 모집을 허락해달라는 상소문을 올려 직접 의병을 모았고 훈련을 시켰다. 즉 불법을 지식적인 차원에 가둬두지 않고 그 진의를 헤아려 몸소 행했던 것이다. 지식과 문자가 넘쳐나는 오늘날, 이를 대하는 우리도 사명대사와 같이 진의를 헤아리고자 하는 의식적 행함이 필요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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