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현 주필
 

 

촌철살인(寸鐵殺人), 이 말은 더 말할 것 없이 작은 쇠 조각 하나로도 살인을 할 수 있다는 의미를 지닌다. 비유적으로는 핵심을 찌르는 짧은 말 한마디의 파괴력과 위력을 표현하는 4자성어다. 동서양에는 그 같은 파괴력과 위력을 지닌 촌철살인의 경구와 격언, 속담, 현인들의 명언이 많다. 지금도 그 같은 촌철살인의 표현들은 쏟아져 나온다. 부자들의 진정성 없는 자선을 일컫는 ‘악어의 눈물’이나 부의 양극화와 부의 편중을 비판하는 ‘1%대 99%의 대결’과 같은 것들이 그것들 중의 일부일 것이다. ‘성숙’의 꼭짓점을 찍은 자본주의의 모순과 소수 부자에 대한 비판, 부자와 빈자의 위화감에 절망한 경제적 약자들의 시각이 그 표현에 집약돼 있다.

정치인들은 이 같은 촌철살인의 표현들을 자신들의 정치적 야심 달성을 위해 본능적인 치열함을 가지고 이용한다. 촌철살인의 표현은 대개 감성적이고 감각적이며 감동적이고 때로는 선동적이다. 전광석화와 같은 짜릿함으로 감동이나 전율, 복잡한 상황에 대한 명료한 파악력을 제공한다. 그것은 또한 무더위 때의 갈증을 달래주는 청량음료와 같은 감각적인 만족감을 전달한다. 그렇기에 대중들은 이에 쉽게 매료된다.

이 같은 통쾌함과 짜릿함, 상큼함 때문에 촌철살인의 표현을 접하는 순간에는 그 표현이 담고 있는 진실성의 함량에 대해 의심을 품을 겨를이 없다. 그저 무릎을 치며 공감하고 받아들이기 마련이다. 물론 대부분의 촌철살인적인 표현에는 진실성의 함량이 충분하다. 그렇지만 털끝만큼의 흠을 잡을 수 없을 만큼 완벽하고 충분한 진실성만을 담고 있는 표현은 없다. ‘악어의 눈물’이나 ‘1%대 99%의 대결’과 같은 표현도 그러하다. 그렇더라도 대중들을 사로잡는 것은 진실성의 함량이 관건이 되지는 않는다. 대중들은 그들의 처지나 그들이 하고 싶은 말을 지루하지 않게 촌철살인으로 통쾌하게 대변해주면 그걸로 족한 것이다. 촌철살인의 표현에다 내용까지 진실성으로 꽉 차 있다면 더 말할 나위가 없지만 말이다.

1863년 11월 19일 미국 남북 전쟁 중에 있었던 게티스버그 군인 묘지 헌정식에서의 일이다. 링컨 대통령은 주지사와 국무장관, 영국주재 대사, 하버드 대학 총장 등을 지낸 당대의 명연설가 에드워드 에브렛(Edward Everett)이 2시간이 넘게 떠든 장광설에도 청중을 감동시키지 못한 연설을 단 2분간의 촌철살인으로 끝냈다. 그것이 그 유명한 게티스버그의 명연설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Government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 달리 말해 민주 정부에 관한 불후의 정의였다. 그는 타고난 촌철살인의 명연설가였다. 그렇게 짧은 시간의 간단명료한 연설문에 이처럼 완벽한 내용을 담은 진실성이 있는 명연설을 할 사람은 적어도 민주주의의 정의에 관한 한 링컨말고는 전무후무할 것이다. 정치인치고 말 못하는 정치인은 없지만 그래도 촌철살인의 말재간이 출중하지 않으면 그 정치인은 연예인 스타와 같은 대중의 큰 인기를 누리는 대중의 우상이 되기는 어렵다.

이것이 말 잘하는 대중의 우상과 같은 정치인이 나타나는 민주주의 정치에서 자칫 공복인 정치인이 역설적이게도 대중의 조종자(Manipulator)가 되고 대중은 그들의 주인이 아니라 도리어 추종자(Sycophant)가 되기 쉬운 엉뚱한 부작용을 낳기도 한다. 시대 상황이 성장지상주의가 아니라 고른 분배가 요구되고 서민들의 상대적 박탈감과 복지 수요가 폭발 직전에 이른 바로 지금이 그 같은 위상전도의 역설적 현상이 일어나기 딱 좋은 시점이다. ‘사람이 사람에게 늑대(Homo Homini Lupus; Man is a wolf to man)’라지만 ‘정치인이야말로 정말 대중에게 교활한 늑대’일 수 있다는 것에 대해 속는 것이 습관이 된 대중은 결코 방심해서는 안 되는 까닭이다.

‘1%대 99%의 대결’ 구호는 미국 반 월가(Wall Street) 시위대의 한 연설자가 사용한 말이다. 촌철살인의 선동적인 구호다. 적과 동지를 편 가르는 이분법적인 정치에 집착하는 한국 정치인들에게 전의를 돋우는 영감을 불어넣기에 딱 알맞은 말이며 실제로 그 구호는 직수입돼 정치 슬로건으로서 엄청난 위력을 발휘중이다. 서민 대중들에게 촌철살인의 감동과 통쾌함을 전달하고 있다. 이 말 속에 담긴 ‘진실성의 함유량’은 의아스럽지만 정권을 담당하고 있는 것이 죄라면 죄라서 정권 담당 세력들은 적절히 대응을 못하고 갈팡질팡한다.

자칫 1%의 ‘나쁜 적’으로 몰리지 않고 99%의 환심을 사 ‘좋은 우군’에 속하기 위해 수비측도 공격측만큼이나 포퓰리즘적인 공약을 쏟아낸다. 민주 정부가 들어서고 인권이 회복된 이후로도 이렇게 당마다 소나기식으로 선심 경쟁, 인기 쟁탈전을 펼치기는 초유의 일이다. 이게 복인가 재앙인가. 공짜 싫어할 사람 없지만 공짜 좋아하다가 결국 웬 복인가 했던 것이 재앙이 되는 것은 아닌가.

정치인들이 경제적 불평등을 정치 이슈화 하는 것은 그 해결 방안을 위한 분위기를 열띠게 잡아가는 것이므로 일면 나쁠 것은 없다. 사실 그것을 피해갈 상황도 아니다. 하지만 포퓰리즘이 지나치면 나라 곡간이 거덜 나며 성장 동력도 죽고 공약 실현에 쓰일 세원도 고갈된다는 것을 더 강조할 필요는 없다. 그런 일이 없어야겠지만 만약 그런 일이 있다면 늑대같고 여우같은 정치인들이 책임을 뒤집어쓰지는 않는다, 온통 국민에게 재앙이 될 뿐이다. 따라서 정치인들은 표를 얻는 것이 아무리 갈급해도 촌철살인의 선동적이고 인기 영합적인 슬로건으로 국민을 현혹해서는 안 된다.

차라리 손가락으로 황홀한 달을 가리키지만 그들의 속마음은 권력과 같이 탐내는 홍시에 있다는 것을 솔직하고 촌철살인의 달변으로 밝혀주었으면 좋겠다. 그렇지만 국민이 그들의 검은 속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어도 그들은 그렇게 드러내놓고 까발리지는 못할 것이다. 그것도 국민들은 안다. 그나저나 누가 ‘악법도 법(Dura lex, sed lex)'이라했다는데 ’나쁜 정치도 정치‘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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