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수 한체대 스포츠 언론정보연구소장
25년 전 프로야구 취재기자였을 때, 호남 연고의 해태 타이거즈 인기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홈구장인 광주 공설운동장 야구장을 비롯해 전국의 각 야구장에서 해태 경기가 열릴 때면 호남출신의 관중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학생, 회사원, 노동자 등 다양한 계층이 이질적으로 뭉친 호남 관중들이지만 군부 쿠데타로 등장한 5공화국 정권이 민심이반을 다스리기 위한 목적으로 시작한 프로야구에서 한마음이 돼 억눌린 5.18광주민주화항쟁의 울분을 폭발시켰다. ‘목포의 눈물’ ‘비내리는 호남선’ 등 한 맺힌 호남의 정서를 고취시키는 노래들이 스탠드를 장식했다. 잠실, 대전, 인천 구장 등은 해태 타이거즈의 원정경기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홈구장인 양, 수천 명의 호남 관중들은 응원단장의 호루라기 장단에 맞춰 박수를 치며 응원가와 대중가를 불렀다. 경찰과 정보 당국자들은 서슬 퍼런 눈초리로 감시를 했지만 야구장은 응집력 높은 호남관중들이 뭉쳐 그야말로 ‘해방구’를 이루었다. 호남 특유의 근성과 애향심을 발휘한 관중들의 뜨거운 성원에 힘입어 해태 타이거즈는 막강 전력을 발휘하며 프로야구를 초토화시켰다. 1983년 첫 우승을 차지한 해태 타이거즈는 1986년부터 89년까지 전대미문의 4연패를 달성했다. 공통의 정서로 뭉친 호남 관중과 선동열, 김성한 등 근성 강한 선수들이 합작을 이룬 결과였다.

해태 타이거즈의 관중은 엄밀히 말해 반 정치화된 관중이었다. 강력한 통치와 실정법 등으로 인해 데모와 반대 투쟁을 할 수 없는 현실에서 겉으로 대놓지 않고 위정자들에게 울분과 한을 토해낼 불쏘시개 역할을 한 게 해태 타이거즈라는 프로야구팀이었기 때문이었다. 당시는 정치적인 집회의 자유가 상당히 제한돼 많은 군중들이 그나마 모일 수 있는 기회는 프로야구 등 스포츠경기가 열릴 때뿐이었다. 국민들의 관심을 정치보다는 스포츠로 유도하려는 5공화국 위정자들의 의도가 엉뚱하게도 스포츠를 통해 많은 군중을 모일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줬던 것이다. 관중들은 지역 연고제로 운영되는 프로야구 등 프로스포츠에서 정치적인 불만을 결집시키는 힘을 마련해 저항적인 몸짓을 위정자들에게 보냈다.

이에 반해 롯데 자이언츠, 삼성 라이언즈, 빙그레 이글스, OB 베어스, 삼미 스타즈 등 다른 팀들의 홈 관중들은 정치적인 결집력이 높았던 해태 타이거즈와는 상당히 다른 분위기였다. 지역 연고를 기반으로 해 고향팀을 순수하게 응원하며 좋아하는 팬들이 주종을 이루었다. 비정치적인 관중이었지만 이들도 연고지라는 일체감을 갖고 고향팀이 좋은 성적을 내기 위해 적극적인 성원과 관심을 보여주었다.

1988년 서울올림픽과 2002년 한‧일 월드컵 관중은 어찌 보면 자발적인 스포츠 관중들이었다. 단군 이래 처음으로 올림픽을 유치해 동서 화합과 세계 평화를 도모하는 결정적인 계기를 만들었던 서울올림픽에서 관중들은 개막식과 폐막식, 각 경기장 등에서 세계를 놀라게 한 질서의식과 단체정신을 보여주었다. 좋은 경기력을 보여준 선수들에게는 공산권 국가나 자유주의 국가를 가리지 않고 박수를 보내며 격려해 주었고, 경기가 끝난 뒤 쓰레기 등을 스스로 치우고 일사분란한 출입 등으로 모범적인 모습을 연출했다. 2002년 한‧일월드컵에서는 한국 축구가 사상 처음으로 월드컵 4강에 오르는 데 큰 힘을 보탠 것이 거리의 붉은 악마였다. 서울 시민 수백만을 비롯해 주요 도시마다 시민들이 붉은 유니폼을 입고 거리에서 한국 축구의 선전을 기원하는 응원 퍼레이드를 벌여 국가대표 축구선수들에게 마음껏 뛸 수 있는 원동력을 만들어주었다.

경기는 감독, 코치, 선수들만이 하는 게 아니다. 경기를 지켜보고 성원해주는 관중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관중없는 스포츠는 스포츠로서 크게 성장할 수 없다. 특히 산업사회의 발달로 프로스포츠가 성행하는 요즘 시대에 관중의 존재는 그야말로 스포츠에는 생명줄과 같다. 관중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스포츠의 참 가치를 공유할 때 스포츠의 지속적인 발전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관중들은 스포츠를 통해 국가에 대한 사랑, 지역과 각종 지역문화에 대한 사랑을 나타낸다. 또 관중들은 철학적, 심리학적으로 승리와 공통의 정서를 공유하며 스포츠를 보려는 경향도 있다. 따라서 관중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선 행복과 즐거움을 줄 수 있는 다양한 이념과 가치 등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관중이 스포츠의 힘이라는 것은 불문가지의 사실이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엘리아스 카네티가 자신의 명저 <군중과 권력>에서 스포츠 관중을 경기장 양편으로 나누어진 ‘이중 군중’으로 분류하고 스포츠 군중의 현상에서 권력적인 속성이 있다고 한 것은 탁월한 분석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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