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종일 한반도중립화 연구소장

고종(高宗)은 일본이 1904년 2월 한국과 강제로 체결한 ‘한일의정서’에 따라 한국병합을 위한 내정간섭과 개혁조치에 반발하면서, 미국의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 대통령에게 ‘한-미수호통상조약’의 제1조 “거중조정(good offices)” 조항을 근거로 한국의 국권회복을 위해 수차 특사를 파견했으나 결국 실패하게 되었다. 고종은 다음과 같은 특사를 미국에 파견하면서 국권회복 운동을 전개했다.

고종의 첫 번째 지시는 1904년 1월 22일 워싱턴 주재 조민희(趙民熙) 공사를 통해 해이(John Hay) 국무장관에게 한국의 영세중립국 선언에 대한 외교문서를 제출케 하고 미국의 지원을 요청했다.

두 번째 지시는 1904년 9월 30일 니담(Charles Needam; 한국공사관 고문 겸 조지 워싱턴 대학장)을 통해 미국이 한국을 도와줄 것을 요구하는 서신을 루스벨트 대통령 앞으로 서신 발송했다. 편지 내용은 “지금 러시아와 일본은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일본은 한국의 문제를 강압적으로 처리하고 있습니다. 일본은 한국의 국내문제뿐만 아니라 외교문제도 전적으로 그들의 뜻대로 실행하고 있습니다. 한국은 독립을 잃게 될 위기에 처해있습니다. 한국이 독립을 상실하면 어찌 슬프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위험한 시기에 한국은 귀하의 친절한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고종은 아무런 회신도 받지 못했다.

세 번째 지시는 이승만(李承晩)과 윤병구(尹炳求)로 하여금 1904년 9월 루스벨트 대통령을 방문케 하고, 한국의 사정을 설명하고 미국의 중재와 도움을 요청했다. 루스벨트는 그처럼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는 외교문서를 가지고 올 것을 요구하면서 이를 거절했다.

네 번째 조치는 1905년 7월 서울주재 미국공사 몰간(Edwin V. Morgan)에게 미국이 한국을 위해 거중조정을 해 주거나, 국제평화회의를 소집해 줄 것을 요구했으나 몰간은 고종의 요구를 거절했다.

다섯 번째 사절은 1905년 10월 한국에 거주하면서 교사, 작가, 편집자로서 한국을 위해 일하고 있던 헐버트(Homer B. Hulbert)를 미국에 파견했다. 그는 11월 25일 루트(Elihu Root) 국무장관을 방문하고 고종황제의 서신을 루트 장관을 통해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제출했으나 회신이 없었다.

여섯 번째 지시는 1905년 12월 7일 파리주재 민영찬(閔泳瓚) 공사를 통해 루트 국무장관에게 미국의 도움을 전신으로 요구했다. 전신 내용은 “1905년 11월 17일 체결된 한-일보호조약은 일본의 강압으로 조인된 것이므로 무효임을 주장”한 서신을 보냈으나, 미국 정부는 아무런 행동을 할 수 없다는 회신을 보내왔다.

일곱 번째 지시는 1905년 12월 전 한국주재 미국공사 알렌(Horace Allen)에게 1만 불 상당의 금괴를 주면서 미국으로 건너가 한국의 독립을 위해 활동 해 줄 것을 요구했으나, 알렌은 그 돈을 사용하지 않고 후일 그 자금을 고종황제에게 반납했다.

고종의 마지막 조치는, 취재차 한국에 온 영국의 일간 트리뷴(Tribune)지의 스토리(Douglas Story) 기자에게 6개항의 밀서를 내렸으며, 이 밀서는 1906년 2월 8일자 트리뷴지에 다음과 같이 보도되었다. 고종의 밀서는 "1905년 을사늑약은 황제가 조인하거나 동의한 일이 없다. 따라서 일본이 한국의 재정을 통제하는 일도 부당하다. 한국의 황제는 세계열강이 한국을 집단보호 통치하되, 기한은 5년이 넘지 않도록 하기를 바란다. 일본의 침략을 막아주고 한국의 영세중립을 보장하라“는 등의 내용이었다.

스토리 기자는 고종의 서신 내용을 기사로 작성한 후, 그 밀서를 즈푸(芝罘: 지부)주재 버틀러(O‘Brien Butler) 영국 영사에게 주었으며, 버틀러는 북경주재 사토우(Ernest Satow) 영국 공사에게 전달했으나, 사토우 공사는 1905년 8월 12일 체결된 제2차 영-일동맹에 따라 본국에 보고하지 않았다.

고종의 대미외교가 실패한 중요한 원인은 한국이 미국의 국가적 외교목표와 루스벨트의 대 한국정책의 기조를 이해하지 못한 것이었다. 루스벨트는 이미 한국을 일본에 병합하기로 결정한 후 고종의 서신을 접수한 것이다. 고종은 유교사상에 입각하여 국가 간의 의리와 신의를 중시했으나, 루스벨트는 의리보다는 미국의 국가이익을 우선시 하였으며, 거중조정 조항은 국가 간의 조약에 통상적으로 포함되는 외교적 용어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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