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현 주필
 

 

누가 보고 왔을까. 저승에는 5개의 강이 있단다. 그리스의 신화 얘기다. 증오의 강인 스틱스(Styx), 슬픔의 강인 아케론(Akheron), 후회의 강 코키토스(Kkytos), 불의 강 플레게톤(Phlegethon), 그리고 망각의 강인 레테(Lethe)가 그것들이다. 사람의 상상력은 이렇게나 분방(奔放)하고 끝이 없어서 가 볼 수도 없고 가보지 않은 저승까지도 마음대로 뒤진다. 

그 중 ‘레테(Lethe)’라는 강은 잠의 신 히프노스(Hypnos)의 동굴을 관통해 흐른다. 그곳에 도달하면 잠의 신 히프노스가 뭐라 계속 중얼중얼거리고 속삭인단다. 그러면 저승의 길손은 최면(Hypnosis)에 걸린 듯 쏟아지는 졸음을 견디기 어려워진다. 따라서 레테는 히프노스가 지배함으로써 길손으로 하여금 졸음이 쏟아지게 하는 졸음의 강이다.뿐만 아니라 레테는 망각의 강(The River of Oblivion)이란다. 땅 속에 묻힐 육신을 벗어나 저승에 온 영혼은 반드시 이 황천의 강물을 마셔야 한다. 이 강물을 마시고 나면 전생, 즉 지상에서의 일은 깨끗이 잊게 된다. 영혼이 백지상태로 재생되는 셈이다. 이렇게 망각의 강, 레테의 물을 마시어 전생의 기억을 일단 지우고 나서야 새 육신, 새 영혼을 가지고 다시 지상에 태어날 수 있다(incarnation)는 것이다. 동양의 정서와 친화적인 불교의 윤회설을 생각나게 하는 신화다.

누가 이 같은 허구의 신화를 만들어냈을까. 영혼을 불귀(不歸)의 객으로 만들지 않은 것으로 보아 그는 틀림없이 지상의 삶에 큰 애착을 가진 사람, 죽었다가도 다시 태어나 이 땅에 살기를 바랐던 사람이었을 것이다. 하긴 그러지 않을 사람이 있겠는가. 설사 내세의 지복(至福)을 약속받았다 하더라도 이 세상에서의 삶을 얼른 포기할 사람은 없다. 비록 인생의 싸움터에서 ‘말 못하고 쫓기는 짐승(dumb driven cattle)’과 같은 삶을 살더라도 생을 쉽게 포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인생을 완주(完走)하는 것, 주파(走破)해야 하는 것, 그것은 지엄한 하늘의 명령이 아닐 것인가. 그것이 그렇다면 자살과 같은 방법으로 생명을 중도에 허투루 버리는 것은 필시 그 같은 명령을 거스르는 죄악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생은 실재이며 진지한 것(Life is real, life is earnest)’이라 했나. 민중 항쟁에 대한 무자비한 무력 진압에 의해 ‘인간 도살장’으로 변한 중동의 살벌한 시리아에서도 사람들은 절규하고 몸부림칠망정 치열하게 산다. 죽기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저항한다. 저개발국의 빈곤과 폭정이 사람들의 생존을 위협하는 상황에서도 그 사람들의 생에 대한 애착은 잘 살고 자유스러운 나라 사람들의 그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배고프고 인권이 없는 폐쇄 사회, 북한에서도 동포들은 끈질기게 생을 이어간다.

압록강 두만강이 그 생지옥에서의 고통을 잊는 ‘레테’와 같은 ‘망각의 강’이 되어주었으면 좋으련만 살아서 넘는 그 강은 동포들에게 그렇지가 못하다. 그 강을 넘어도 새 육신, 새 영혼으로 태어나는 광명한 세상은 아닌 것이다. 광명을 찾아 제3국의 국경을 무사히 넘을 때까지 한도 끝도 없이 넓은 광막한 대륙을 공포와 고통 속에서 여전히 쫓기며 헤매어야 한다. 사람의 상상력이 아무리 저승을 뒤질 만큼 비상하고 우리가 그들과 한 핏줄일지라도 그 암울한 사지를 방황하는 동포들의 몸서리쳐지는 공포감과 고통을 제대로 느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들이 치외법권이 허용되는 외국 공관에 뛰어들어도 인권이라는 인류의 보편적 가치에 눈이 틔지 못한 괴물과 같은 신흥강대국 중국의 완력에 눌려 그 땅을 떠날 수가 없다. 심지어 14살, 18살에 한국의 베이징 주재 영사관에 숨어들어온 동포 청소년들이 그곳에서 3년을 갇혀 지내고 있다는 사실이 뒤늦게 공개됐다. 그동안 한국 정부와 한국의 지도자들은 입을 닫고 있었다. 무엇이 무서워 침묵했는가. 그 침묵이야말로 죄악 아닌가.

그 같은 사실이 공개된 지금에도 가장 흥분할 법한 양심과 인권, 진보를 입에 달고 사는 세력들까지도 침묵하고 있다. 미국에 대해서는 그들과 맺은 자유무역협정, 더구나 애초에 자신들이 발의했던 FTA와 같은 국제 조약까지도 폐기하겠다고 호언하는 그들의 침묵을 이해할 수가 없다. 그들에게 가치 판단의 ‘저울’이 있다면 그것은 지나치게 편향된 이념이 심각하게 망가뜨려 놓은 고장난 저울은 아닐까. 균형을 찾아가는 동역학(動力學)의 복원력을 잃었다면 그 저울은 가치를 잃었다.

한국의 정치는 십자포화가 오가는 전쟁이다. 공천은 정파 간에 인재를 발굴해내는 과정이 아니라 흡사 전사(戰士) 내지 이념적인 행동대원을 모집하는 경쟁이다. 이 같은 정치의 불랙홀에 국민과 함께 ‘장외(場外)’의 냉정한 심판자가 돼야 할 시민단체(NGO)와 노조의 최상급단체는 물론 가버넌스(Governance)의 지도적 위치에 도달하기에는 아직 멀어 보이는 의외의 사람들까지 흡인되어간다. 이는 오염의 확산이다. 결국 그게 그것이지만 이리와 늑대의 싸움인 정치의 실행자들에게 맛있는 고깃덩이와 같은 권력만 눈에 보이지 기실 국민과 국가, 민족은 안중에도 없다는 것을 웅변한다.

선거 분위기가 고조돼 가면서 극단적으로 대치한 대표적인 두 정당 중 비집권 정당은 총선과 대선을 이겨 집권세력을 ‘심판’하고 ‘복수’할 것임을 선언했다. 한풀이 정치다. 누구를 위한 한풀이인가. 그들끼리의 한풀이다. 이같이 그들끼리의 핏발 선 싸움에 골몰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탈북 동포들의 고통이 초미의 관심사가 아닐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한반도 주변에 일며 한반도의 안위와 직결되는 위태위태한 국제 정세의 격랑이 보일 리 없다. 마땅히 그래야 하지만 국가 민족의 앞날을 ‘0(零)’ 순위로 생각하는 사람들 같지도 않다. 레테의 강물을 마시게 한들 그들의 영혼은 새롭게 재생되기 어려울 것 같다. 그들은 국민들에게 사죄를 거듭해왔다. 하지만 뒤돌아서면 말짱 도루묵 아니었나. 그들에게 ‘영혼’이 있는가.

이런 정치인들에게 국민은 생명과 재산, 행복을 맡겼다. 국민의 생명과 재산, 행복을 담보로 잡은 정치인의 수준은 유권자인 국민이 결정한다. 국민의 수준이 정치의 수준인 것이다. ‘인생이 실재하는 것이고 진지한 것’이지만 정치도 엄연한 현실이다. 잠의 신 히프노스의 최면  술과 같은 정치인들의 주술에 국민들이 흔들리거나 깨어있지 않고 잠이 들면 안 되는 까닭이다.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