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우 소설가 문화칼럼니스트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너는 온다/ 어디 뻘밭 구석이거나/ 썩은 물 웅덩이 같은 데를 기웃거리다가/ 한눈 좀 팔고, 싸움도 한판 하고,/ 지쳐 나자빠져 있다가/ 다급한 사연 들고 달려간 바람이/ 흔들어 깨우면/ 눈 부비며 너는 더디게 온다/ 더디게 더디게 마침내 올 것이 온다/ 너를 보면 눈부셔/ 일어나 맞이할 수가 없다/ 입을 열어 외치지만 소리는 굳어/ 나는 아무것도 미리 알릴 수가 없다/ 가까스로 두 팔을 벌려 껴안아 보는/ 너, 먼 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아’  

봄이, 그렇게 ‘먼 데서 이기고 돌아’왔지만, ‘마침내 올 것이’ 왔지만, ‘가까스로 두 팔을 벌려 껴안아’ 보지 못하고, 그는 떠나버렸다. ‘봄’을 노래했던 이성부 시인이 며칠 전 세상을 떠났다. 고교 재학 중 전남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됐고, 1962년 현대문학에 ‘백주’ ‘열차’가 추천되어 등단했던 시인은 부드러운 서정성으로 사람과 자연을 노래했다. 사회에 대한 깊은 고민과 성찰도 잊지 않았다. ‘벼’는 민초들에게 던지는 따뜻한 격려이자 사랑의 메시지였다.

‘벼는 서로 어우러져/ 기대고 산다/ 햇살 따가와질수록/ 깊이 익어 스스로를 아끼고/ 이웃들에게 저를 맡긴다// 서로가 서로의 몸을 묶어/ 더 튼튼해진 백성들을 보아라/ 죄도 없이 죄지어서 더욱 불타는/ 마음들을 보아라 벼가 춤출 때/ 벼는 소리없이 떠나간다// 벼는 가을 하늘에도/ 서러운 눈 씻어 맑게 다스릴 줄 알고/ 바람 한 점에도/ 제 몸의 노여움을 덮는다/ 저의 가슴도 더운 줄을 안다// 벼가 떠나가며 바치는/ 이 넓디 넓은 사랑/ 쓰러지고 쓰러지고 다시 일어서서 드리는/ 이 피묻은 그리움/ 이 넉넉한 힘…’

생전에 시인과 함께 많은 산들을 누비고 다녔다. 지나간 내 생애 아주 즐겁고 행복했던 순간이 시인과 함께한 시간들이었다. 우리가 가장 많이 올랐던 북한산 곳곳에 추억이 어려 있다. 대남문, 동장대, 향로봉, 비봉, 백운대, 사모바위, 의상봉, 원효봉, 형제봉, 심지어 구기파출소마저 정겹다. 시인은 산꾼이었다. 시간 나는 대로 산에 올랐고, 사람들을 산으로 이끌었다. 시간을 쪼개 백두대간을 다 밟았고 전국 곳곳의 산들이 시인을 맞았다. 산은, 시인의 마음 밭이었고 시 밭이었다. 사람들은 시인의 시를 통해 산을 느꼈고, 거기서 사람도 만났다.

시인의 고향은 광주다. 태생적으로 외면할 수 없는 현실이 있었다. 아팠을 것이다. 주먹을 불끈 쥐거나 눈을 부릅뜨는 일은 없었다. 산에 오른 것은, 산에 같이 가자고 한 건, 아마 그런 것 때문이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짐작만 할 뿐, 누구도 왜, 어떠시냐고 묻지 않았다. 산에 갈 수 있으면, 그냥 산에 갈 뿐이었다. 육신을 떠난 시인의 영혼이, 필경 산에 머물고 있을 것이다. 북한산이나 어느 산, 봉우리나 골짜기에 가면, 시인이 거기 있을 것이다. 조금 있으면 진달래가 왕창 피어날 수유리쪽 진달래 능선에서라면, 틀림없다. 시인이 생전 육필로 쓴 시들을 모은 ‘우리 앞이 모두 길이다’를 들여다본다. 흑백 사진 속, 시인이 품 넉넉한 어느 북한산 바위에 앉아 있다. 볕 잘 들고 바람 솔솔 부는 날이면, 거풍 한 번 하면 좋겠다며 궂은 농담을 하기도 했던, 그 바위다. 볕 좋고 바람 솔솔 부는 날, 거기서, 시인이 발가벗고 거풍을 하고 있을까. 영혼은 안 보이니까.

시인은 가고 없으나, 시는 남았다. 그래, 시인을 또 만나는 것이다. 그러면서, 또 우리들은 우리들의 길을 걸어야 한다. 시인은 그래, 미리 이렇게 노래해 두었다. ‘우리 앞이 모두 길이다’고.

‘이제 비로소 길이다/ 가야 할 곳이 어디쯤인지/ 벅찬 가슴들 열어 당도해야 할 먼 그곳이/ 어디쯤인지 잘 보이는 길이다/ 이제 비로소 시작이다/ 가로막는 벼랑과 비바람에서도/ 물러설 수 없었던 우리/ 가도 가도 끝없는 가시덤불 헤치며/ 찢겨지고 피흘렸던 우리/ 이리저리 헤매다가 떠돌다가/ 우리 힘으로 다시 찾은 우리/ 이제 비로소 길이다/ 가는 길 힘겨워 우리 허파 헉헉거려도/ 가쁜 숨 몰아쉬며 잠시 쳐다보는 우리 하늘/ 서럽도록 푸른 자유/ 마음이 먼저 날아가서 산 넘어 축지법!/ 이제 비로소 시작이다/ 이제부터가 큰 사랑 만나러 가는 길이다/ 더 어려운 바위 벼랑과 비바람 맞을지라도/ 더 안 보이는 안개에 묻힐지라도/ 우리가 어찌 우리를 그만둘 수 있겠는가/ 우리 앞이 모두 길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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