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 서울역사 앞마당엔 오른손에 수류탄을 들고 비장하게 누군가를 응시하고 서 있는 노신사가 있다. 오늘따라 왠지 다시 한번 그 노신사의 생각과 사상과 사랑과 충절에 흠뻑 빠져보고 싶다.
그동안 묻혀있던 그의 정신과 행적에 우리는 왜 관심을 갖기 시작하는 걸까. 그것은 이 시대가 그와 같은 사상가를, 교육자를, 종교인을, 애국자를 진심으로 갈망하고 있음을 방증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는 행동하는 교육자요 애국자요, 오늘 다시 우리 곁에 살아 돌아온 왈우(曰愚) 강우규 선생이다.
말은 있어도 행동하지 않는다면 그 말은 죽은 말이 된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한 말과 가르침을 몸소 실행함으로써 본을 보인 위대한 선각자(先覺者)였다.
나라를 빼앗길 수밖에 없었던 것도 무지의 소치임을 자각하고, 그 난세에 미래를 책임질 청년들을 위해 학교를 세워 눈을 띄우기를 힘썼던 강우규 선생. 그는 1919년 9월 2일 노구를 이끌고 블라디보스토크를 경유, 서울로 잠입, 적장을 향해 흉탄을 던졌다.
자신을 희생해 미래를 짊어질 젊은이들 앞에, 나아가 민족 앞에 해야 할 일이 뭔지를 알리기 위해 64세 노년의 나이로 당당히 본을 보인 위대한 지도자였다.
그는 왜 새로 부임하는 3대 신임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의 가슴을 향해 흉탄을 날렸을까. 언급한 바대로 말과 가르침에 대한 책임감이었다.
먼저는 꺼져가는 등불 앞에서 민족의 미래를 책임질 청년들에게 민족혼을 심기 위함이었을 것이며, 또 하나는 1·2대 총독과는 성격이 다른 새로 부임하는 총독의 의식과 목적이 문제였을 것이다. 신임총독은 단순 무력에 의한 식민통치 차원을 넘어 민족의 정신과 문화를 말살해 민족의 뿌리조차 뽑아버리고자 철저히 계산된 인물이었다는 사실이다.
강 의사가 남긴 사이토 마코토에 대한 기록을 보면 “천의(天意)를 위배하며 세계의 대세인 민족자결주의와 인도정의로써 성립한 평화회의를 교란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하늘의 계명을 범하여 조선인민 2천만을 궁지에 몰아넣어 그 어육으로 삼으려는 것이다”라고 통분했다. 이는 6개월 전 있었던 민족종교지도자 33인이 외쳤던 독립선언의 연장이었으며, 철저한 민족주의자요 평화주의자요 기독종교인이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같이 암울한 상황에서 그는 자기 몸을 희생해 자라나는 청년들에게 행동으로 현실을 알리려 했으며, 그로 말미암아 청년들이 깨어날 때 비로소 잃었던 나라도 되찾을 수 있다는 신념이 그를 행동하게 했을 것이다.
또 그는 현명했고 솔직했다. 당시 세계의 정세를 간파한 그는 일본이 조선을 앞섰음을 인정했고, 조선이 일본에 배워야 함을 인정했다. 그러나 이웃나라를 무력으로 점령, 나아가 통치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주장이었으며, 그 증거가 바로 ‘동양평화론’이다. 이 동양평화를 해치는 원흉이기에 없애야 했던 것이다. 이것이 적장을 죽이려했던 이유 중 숨겨진 이유다.
안중근 의사는 10년 전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이유가 동양평화를 저해했기 때문이라고 밝혔듯이, 10년 후 강우규 선생 역시 동양평화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재확인하는 순간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안 의사나 강 의사나 종교적 이념의 구현에 그 바탕을 둔 사상이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로 보건대 오늘날 동양3국은 상호협력하여 90여 년 전 주창한 이 동양평화의 중요성을 재인식해야 한다. 작금에 현저히 나타나는 반목과 질시는 동양삼국은 물론 세계평화에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동양평화론’은 시대의 명령이요 이 지구촌의 염원임을 시대를 앞서간 선각자들은 부탁하고 있다.
이제 말하고자 함은 90여 년 전 상황이나 오늘날의 상황이 다르지 않음을 알리고 싶다. 그 때는 아집과 무지로 말미암아 나라를 빼앗기고 빛이 없는 밤이 되고 말았으니 광복(光復)이 필요했다,
오늘날은 아직까지 불완전한 나라라 할지라도 자유롭게 살 수 있는 터전은 있다. 하지만 우리의 생각이 낡고 부패해 불의가 판을 치는 세상이 되고 말았으니 이 시대가 다시 진정한 광복의 때임을 깨닫자.
그렇다면 이럴 때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뭘까. 당시 강우규 선생이 가졌던 정신과 의식 나아가 가치관이 절대적으로 요구되고 있음과 동시에, 그와 같은 지도자가 처절하리만큼 그리운 시대다. 도리와 의리와 정의와 철학과 미래가 없는 청년들의 의식은 과연 어디서 기인된 것일까. 행동하는 지식인과 섭리를 아는 종교인과 진정한 애국자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날 청년들은 ‘세계평화의 초석이 바로 동양평화’임을 역설한 선각자들의 사상을 추억하며, 폭력과 불의 대신 역사가 있고 사상이 있고 철학이 있고 미래가 있는 젊은이들로 거듭나 새 역사의 주역이 되기를 주문해 본다.
그리고 이 암울한 시대를 깨우칠 선각자는 과연 없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