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경 한국성폭력상담소 이사 ⓒ천지일보(뉴스천지)

이미경 한국성폭력상담소 이사
수사재판 과정에서 발생하는 성폭력 ‘2차 피해’ 심각
여성 관점 반영된 합리적 시각으로 사건 모니터링 해야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성폭력은 뿔 달린 악마가 저지르는 게 아닙니다. 누구든지 자기도 모르는 상태에서 가해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평소에 자기 점검을 해야 합니다.”

11일 오후 이화여대 아시아여성학센터에서 만난 이미경(53) 한국성폭력상담소 이사는 성폭행 보호프로그램과 관련된 연구 논문을 준비하느냐 바쁜 모습이었다.

최근 대법원에서 ‘증인여성아동장애인 보호프로그램’을 연구 용역으로 발주했는데, 이대 아시아여성학센터 등 세 기관이 공동으로 연구 프로젝트를 맡았다고 한다.

이 이사는 지난 20여 년 동안 성폭행 상담 현장을 통해 만났던 피해자들의 분투 과정이 눈에 아른거리는지 빨리 논문을 완성해 성폭행 피해자들을 돕고 싶은 듯 보였다.

대학 시절 그는 여성학을 전공했다. 전공 덕분일까. 그는 지금까지 가부장제사회 속에 묻혀 있던 ‘고통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있었다.

이 이사는 성폭력 사건 이후에 겪게 되는 ‘2차 피해’가 매우 심하다고 말했다. 그는 ‘정조에 관한 죄’를 예로 들었다. 그는 성폭력 범죄를 다루는 법의 보호법익은 ‘정조’였다고 말했다. 정조란 가부장제사회에서 대를 이을 아들의 정통성 확보를 위해 여성의 성적 순결을 강요하고 통제하는 것을 의미한다.

“과거, 성폭력 범죄를 다루는 형법 제32장의 제목은 ‘정조에 관한 죄’였습니다. 성폭력을 여성의 성적 위엄이나 고결함을 해치는 행위라기보다는 여성에 대한 일부일처주의(한 남자에 의한 독점적 접근)를 위반한 범죄로 보았습니다.”

이후 ‘정조에 관한 죄’는 여성계의 반발로 1995년에 ‘강간과 추행의 죄’로 개정됐다. 하지만 현행 형법이나 성폭력특별법은 강간(297조)과 강제추행(298조) 등 범죄 행위중심의 법 규정을 나열했을 뿐 보호법익이나 성폭력의 개념을 정의하지 않았다고 그는 지적했다.

그는 이처럼 뿌리 깊은 정조에 관한 통념 때문에 피해자들은 경찰 신고 단계에서부터 형사사법 절차 전 과정에 걸쳐 담당자들의 ‘정조’와 연관된 수많은 개념과 맞서야 했다고 말했다.

“강간 사건의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피해자들은 흔히 ‘성관계 경험이 있느냐’는 질문을 받습니다. 이러한 질문은 피해자들이 성폭력을 유발했거나, 합의에 따른 성관계를 하고 소(訴)를 제기한 ‘질 나쁜 여성’으로 몰아갑니다.”

반면 가해자에게는 누구도 과거의 성관계 경험을 묻지 않는다며 단지 성폭력 관련 전과가 있는지 정도만 조사한다고 그는 꼬집었다.

그에게 2차 피해를 없애기 위한 방법을 물어보았다.

“말한 대로 사건 담당자들의 합리적 판단기준은 가부장제를 바탕으로 합니다. 법이라는 것은 문화에서 나온다고 봅니다. 결국 성폭력을 바라보는 시민의 인식이 법에 반영되고 그 안에서 판단의 잣대가 결정됩니다. 이런 이유로 일반 시민이 여성의 관점이 반영된 합리적인 시각으로 사건을 바라보고 꾸준하게 사건을 모니터링 해야 합니다.”

2차 피해의 해결책에 대해 이야기하던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 그는 지금까지 맡은 사건들을 하나씩 떠올리는 듯 보였다. 잠시 숨을 고른 뒤 다시 말을 이어갔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바로 가해자들의 의식 변화입니다. 사실 피해자들이 가장 원하는 것은 (가해자들의) 진심어린 사과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가해자들은 ‘재수가 없어 걸렸네’ ‘나는 그렇게 할 의도가 없었지만 네가 그렇게 느꼈다면 미안하다’ ‘네가 싫다면~ 그래 미안해’와 같은 대답을 합니다. 이게 사과입니까? 내가 그럴 의도가 없었다는 것은 자기 행동에 대한 성찰이 없는 것입니다.”

이 같은 성폭력 피해에 대해서 잘못을 인정하는 게 중요하다고 그는 거듭 강조했다.

인터뷰 말미에 이 이사는 여성에 대한 자신의 말과 행동을 조심해야 한다고 밝혔다.

“일상의 대화에서 자신도 모르게 여성의 신체를 성적 상품화할 경우가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늘 자신의 삶을 되돌아 봐야 합니다. ‘내가 혹시 성희롱적인 발언을 하지 않았나’라고 스스로 물어야 합니다. 그리고 타인의 입장이 돼서 생각해 봐야 합니다. 아주 작은 행동이 바뀌지 않으면 성폭력 문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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