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옥랑 꼭두박물관 관장

동숭아트센터 개관을 준비하면서 한 해 앞선 1988년 3월에 아리 아카데미를 설립했다. 공연장이라는 하드웨어를 채워줄 콘텐츠가 필요했고, 그것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전문 연기자의 재교육 및 훈련을 위한 프로그램이 마련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최형인, 김광림, 윤호진, 기국서, 한무, 손진책, 김아라, 이원경 등 내로라하는 전문가들로 강사진이 구성되었고, 한국적 연기술을 체계화하고 이론화하는 작업이 함께 이루어졌다. 태껸과 수박치기를 기본으로 한 동작훈련인 기본 신체훈련, 발성 및 시창 훈련, 연기술 등이 그때의 강의 내용들이다.

아리 아카데미의 ‘아리’는 생명의 근원을 뜻하는 ‘알’에서 파생된 말이다. 우리 정서의 둥지 안에서 원형적인 한국 연극의 알을 품어내고자 지은 이름이 바로 ‘아리’다. 한국적 연기의 메소드를 정립할 수 있다는 믿음 위에서 아리 아카데미는 출발했고, ‘한국적’이라는 개념을 어떻게 접근하느냐에 아리 아카데미의 발전 여부가 달려 있었다. 신극이 들어온 이래 한국적 연기를 위한 교재나 훈련법이 아직도 정립되지 못했던 만큼, ‘한국적 연기술의 체계적 정립’은 당시 우리 연극계의 절실한 과제였고 중요하면서도 어려운 작업이었다.

나는 혜화동 주택가에 있던 가정집을 개조하여 강의실, 신체훈련실, 샤워실 등의 설비를 갖추었다. 그리고 연기의 초보자들이 아니라 5년 이상의 경력을 가진 중견 연기자들을 수강생으로 구성하여 전원 장학금으로 교육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연기자들이 소속된 각 극단의 대표들이 나의 의도를 곡해하고 비협조적 자세로 일관하는 바람에 진행이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못했다. 연기자들을 빼간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애초의 의도와 달리 초보 연기자들이 수강생의 대다수를 차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시작한 아카데미였건만 언제부턴가는 수강생의 숫자가 점점 줄어드는 상황이 벌어졌다. 수강료를 받지 않는 구조였기에 출석에 대한 의지와 책임감이 생기기 어려웠고, 그나마 다른 극단에서 필요로 할 때는 수업을 빠지는 일이 허다했던 것이다. 일부 연극 담당 기자들의 부정적 시선 또한 나를 힘들게 했다. 돈 있는 사람이 연기자들 데리고 무슨 짓을 하는 건지 두고 보겠다는 식의 시선이 대부분이었다. 당시만 해도 점심을 건너뛰는 연기자들이 많아 나는 직접 아카데미에서 밥을 지어 먹여가며 운영했다. 하루는 연기자들 30여 명의 식사준비를 하고 있는데, 애초 냉소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던 기자가 그 모습을 보고 나에 대한 생각을 바꾸게 된 일도 있었다.

아리 아카데미는 우리 연극계에 새로운 이정표가 될 수도 있었던 최초의 민간 연기교육기관이었다. 의미 있고 중요한 작업이었지만 강사진들 사이의 비전 불일치, 그리고 극단과 배우들의 소극적 태도 등으로 인해 채 1년을 채우지 못하고 마감을 하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나는 몸과 마음이 지쳐갔고, 갑상선에 병이 생겨 커다란 수술까지 받게 되었다. 벌써 20년도 훨씬 지난 이야기다. 나는 지금도 종종 우리의 문화의식과 문화정책이 그때보다 많이 나아졌는지 살펴보곤 한다. 그리고 아직도 우리 사회는 의식의 전환이 필요하고 절실함과 열정으로 매진하는 삶의 자세가 필요하다는 답을 얻게 된다.

요즘에 와서 아리 아카데미를 하면서 만났던 사람들이 각자 자신의 분야에서 유명해진 모습을 볼 때면, 당시의 기억이 영상처럼 눈앞에 펼쳐지면서 나를 추억에 잠기게 한다. 그리고 어느새 미소 짓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그렇게 힘들었던 시절도 세월이 지나면 아름다운 추억이 되는가 보다. 한국 연극의 발전을 위해 기성 연기자들을 재교육하였고, 그런 교육방식이 국내에서는 처음이었다는 것, 바로 거기에 아리 아카데미의 의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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