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학농민혁명은 1894년 동학교도와 농민들에 의해  일어났다. (사진제공: 동학농민혁명기념관)

[글마루=김명화 기자] 수운 최제우 선생은 동학의 창도자다. 동학은 한국 민족 종교의 시발점이며 동학농민혁명의 근본 사상이라는 측면에서 매우 중요하다.  

수운 선생이 동학을 통해 이루고자 했던 이상사회는 현실에서 실현되는 새 세상이었다. 그의 표현대로 말하자면, ‘다시 개벽’을 통해 인간평등을 이루어 낡은 선천세상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후천세상으로 회복하기를 꿈꿨던 것이다. 1894년부터 시작한 동학농민혁명도 이러한 맥락에서 일어난 것이라 볼 수 있다. 동학농민혁명과 동학을 통해 수운 최제우 선생의 삶과 사상을 조명해 본다.

“탐학하는 관리를 없애고 그릇된 정치를 바로잡는 것이 무엇이 잘못이며 사람으로서 사람을 매매하는 것과 국토를 농락하며 사복을 채우는 자를 치는 것이 무엇이 잘못이냐. 내 너희를 쳐 없애고 나랏일을 바로 잡으려다가 도리어 너희 손에 잡혔으니 너희는 나를 죽일 뿐이요. 다른 말은 묻지 말라. 내 적의 손에 죽기는 할지언정 적의 법을 받지는 아니하리라.” -전봉준

1895년 3월 29일.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이날 일본군은 동학농민혁명을 주도했던 녹두장군 전봉준의 교수형을 집행했다. 살려달라고 말하면 원하는 모든 것을 들어주겠다고 일본군은 제의했지만 전봉준 장군은 이를 뿌리치고 의연하게 죽음을 택했다. 그토록 꿈꿔왔던 조선의 개벽을 눈으로 보지 못한 채, 41세의 짧은 생을 형장의 이슬로 마감했다.

전봉준이 주도했던 동학농민혁명은 ‘동학’을 하는 인물들의 지도하에 일어났던 반봉건적, 반외세적 농민 항거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100만 명이나 되는 농민이 초개와 같이 목숨을 바치며 뛰어들었던 최고의 민족민중운동 동학농민혁명. 이렇게 치열한 혁명을 가능하게 했던 원동력은 바로 ‘동학’이었다. 모든 사람이 한울님처럼 대접받을 수 있는 세상을 꿈꿨던 동학. 그 뿌리와 정신이 무엇인지 조심스럽게 접근해 본다.

동학은 종교가 아닌 도(道)

“동학은 종교가 아니다.”
박맹수 교수는 일반적인 종교 학자들의 의견과 사뭇 다른 주장을 했다. 그는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해월 최시형 연구’로, 일본 북해도대학 대학원에서 동학사상에 관해 연구해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원광대학교 원불교학과에 재직 중이다. 박 교수는 동학을 서양 종교(宗敎, religion)의 관점으로 보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동학을 창도한 수운 최제우 선생이 동학을 하나의 교리로, 혹은 신앙의 대상으로 체계화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수운 선생이 쓴 ‘동경대전(東經大全)’을 보면 동학은 동쪽 나라인 조선 땅에서 받은 ‘도(道)’라고 표현돼 있다. 수운 선생은 동학을 사람이 마땅히 배워야 할 ‘길’이며, 실천해야할 학문으로 창도한 것이지 ‘신(神)’을 대상으로 하는 신앙의 대상으로 삼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우리나라에서 ‘종교’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한 때는 1900년대부터다. ‘독립신문’ ‘황성신문’과 같은 근대적 신문과 ‘대한학회’와 ‘기호흥학회’등이 발간했던 잡지에서 쓰기 시작하면서 대중에게 알려졌다. 19세기 초까지만 해도 동양 사상들을 유도(儒道), 불도(佛道), 선도(仙道)’라 불렀고 서양종교인 그리스도교까지 서도(西道)라고 불렀다.

서양 종교는 동양의 사상들과 달리 신을 종교의 핵심으로 삼지만 동양 사상은 사람을 교화해 변화하게 할 수 있게 만드는 신념체계와 수행과정을 가지고 있느냐가 중요하다. 위와 같은 의미에서 볼 때 수운 선생이 창도한 동학은 종교가 아닌 동양적인 ‘도’의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

수운, 한울님을 만나다

1860년 음력 4월 5일, 경주 구미산 아래 용담정에서 37세의 수운 선생은 천계(天啓), 즉 한울님과 문답을 통해 동학을 창도한다. 잦은 민란과 자연재해, 관리들의 횡포로 도탄과 위기에 빠져 있던 조선 사회를 바꿔보고자 1854년 수행에 들어갔던 수운 선생이 6년 만에 드디어 종교체험을 한다. 그는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 몸이 몹시 섬뜩해지고 떨리더니 밖으로부터 신령(神靈)한 기운이 접해왔고 안으로부터 가르치는 말씀이 내렸다. 무슨 병에 걸린 듯 했으나 증세를 집어낼 수 없었다.” - ‘논학문’-

수운 선생은 자신이 만난 존재는 세상 사람들이 ‘상제’라 부르는 이였으며 그를 통해 선약인 ‘영부’와 ‘주문’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 결과 한울님의 마음과 자신의 마음이 하나가 됐으며 새로운 의미의 세계가 환하게 열렸다고 설명했다. 이러한 일을 겪은 후 수운 선생은 결코 피할 수 없는 사명감이 일어났다고 덧붙였다.

수운 선생은 1861년 4월경 주문과 심고법을 만들어 수행하는 방법을 정하고 사상체계를 세운다. 그는 자신의 세운 신념체계를 ‘무극대도(無極大道)’ 또는 ‘천도(天道)’라고 불렀다. 그러면 수운 선생이 말하는 ‘천도’란 무엇이며 ‘한울님’은 어떠한 존재인가? 일찍이 동학에 입도해 조부로부터 도를 전수받아 오로지 동학 외길만을 걸어온 천도교 선도사 고 표영삼 선생은 자신의 저서 ‘동학’에서 천도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무극대도니 천도니 하는 것은 살아가는 신념의 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세계관, 인간관, 가치관, 역사관, 사회관 등을 말합니다. 결국 동학에서 말하는 도란 모든 신념의 틀인 신념체계를 총칭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수운 선생이 말하는 한울님은 어떤 존재인가? 표 선도사는 “수운이 말하는 한울님은 온 천지생명체계에 인격성을 부여해 인격화한 것”이라고 말했다. 다른 말로 바꾸면, 한울님은 어떤 특정한 존재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우주전체를 이르는 개념이라는 뜻이다.

후천개벽 통해 시천주 모신 새로운 인간으로 회복

수운 선생은 인간이면 누구나 ‘천(天)’을 모신 존재라는 ‘시천주’사상을 주장했다. 시천주 사상은 인간이 곧 하늘이라는 인간평등의 의미를 담고 있다. 고려대 임형진 교수는 “시천주(侍天主) 사상은 한민족이 아득한 옛날부터 믿어왔던 천신숭배 신앙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설명한다. 인간의 존엄성을 하늘과 관련시켜 생각해 왔던 한민족의 전통사상이 동학에 와서 ‘사람이 곧 한울’이라는 대담한 주장에 이른 것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수운 선생의 사상은 유교적 인간관계를 중심으로 했던 봉건 양반 질서에 일대 변혁을 몰고 왔다. 동학의 가르침은 인간이면 상하귀천을 막론하고 시천주자로서 모두 대등하므로 한울님처럼 대해야 한다는 인간평등 사상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수운이 동학을 창도한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그는 현실 속에서 인간의 도덕성을 회복해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려는 목적으로 동학을 창도한 것이다.

수운 선생은 현실 안에서 삶의 변혁을 통해 이루어진 새로운 사회를 ‘후천개벽’이라 말했으며 이 단계를 통해 인간은 한울님을 만나기 전의 모든 질병으로부터 벗어나 ‘다시 태어나는 삶’ ‘군자사람’의 삶을 살아 갈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와 같이 동학은 내세보다는 현세를 위주로 한 사상이다. 현재의 삶 속에서 한울 사람으로 자아를 완성해 가는 것을 지향하는 인간 중심 사상인 것이다. 또한 낡은 선천세상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후천 새 세상을 여는 창조적 변혁을 추구했다.

하지만 수운 선생의 가르침은 유교 질서를 중요시했던 기존의 보수적 유생들과 기득권층에게는 안정적 체제를 뒤엎는 위협적 사상으로 다가온다. 결국 수운 선생은 ‘삿된 도’로 민중을 현혹했다는 이른바 ‘좌도난정(左道亂政)’이라는 죄목으로 대구 경상감영 안의 관덕정 뜰 앞에서 처형당한다. 득도 후 4년이라는 기간 동안 짧은 공적을 남기고 1863년 12월에 체포돼 41세 때 삶을 마감했다. 동학은 수운 선생이 죽은 후 수제자 해월 최시형이 재건했으며 한국 근대사 중 최고의 민족민중운동인 동학농민혁명의 사상적 기반을 제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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